신과 인간의 휴식처, 조선왕릉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능선 위에 우뚝 자리한 조선왕릉. 500년 왕조의 역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조선의 능원은 애초에 조성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어떻게 전쟁의 참화와 도굴, 그리고 개발의 압력으로부터 이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을 푸는 열쇠를 찾아내보자.
도시의 아침이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시간.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왕릉에도 아침햇살이 깃든다. 이윽고 밤새 깊이 잠들어 있던 신들도 서서히 깨어나 일상에 지친 후손들에게 휴식 공간을 내어줄 준비를 한다.
현재 한반도에 보존되어 있는 조선왕릉은 총 42기. 이 중 북한에 있는 2기를 뺀 왕릉 40기가 남한에 현존하고 있으며,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은 단지 돌아가신 왕들의 무덤이라는 좁은 의미에 가둘 수 없다. 때로는 폭군의 학정에 시달리던 때와, 성군의 덕성으로 태평성대를 누렸던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날은 2009년 6월 27일. 이날은 공교롭게도 1408년 6월 27일 새벽에 조선의 태조 임금이 승하한 날. 그래서 날짜를 계산해 보면 600년과 그다음 해인 601년 되는 그날 그 시각에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이 무렵, 변방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는 썩은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품는다. 그리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세력을 모아 역성혁명을 일으킨다. 1392년,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로운 왕조는 새로운 통치 이념을 필요로 했다. 고려왕조를 지배했던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이미 타락한 권력이었다. 조선의 첫 임금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통치할 새로운 이념으로 유교를 채택한다. 유교는 생활 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임금의 애민사상은 유교의 덕목 중 하나였다.
조선왕릉 인근에는 어딜 가나 아름드리 숲이 조성되어 있다. 이는 단지 아름다운 경관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어도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이 반영되었다. 나무의 형태를 보면 날개를 펴서 품고 있는 형태이다. 나무가 오래될수록 뭔가를 품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유교의 첫째 덕목은 충효 사상. 이는 살아계신 부모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에게도 보여드려야 할 후손의 의무였다. 돌아가신 선왕은 그래서 신의 대접을 받는다. 당대 왕조차 감히 신의 능역 안으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오히려 미관말직인 능참봉만이 봉분을 다듬기 위해 능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왕릉의 진입 공간에 들어서면 정자각까지 긴 돌길이 이어진다.
참도라 불리는 이 길의 왼쪽 길은 넓고, 오른쪽은 좁으며 낮다. 왼쪽은 돌아가신 선왕이 다니는 신도. 왼쪽과 오른쪽은 왕이 다니는 어도이다. 왕조차 신도 위로 걸을 수 없다.
조선왕조 27명의 임금 중, 거의 유일하게 후손들이 대왕의 칭호로 존경을 표하는 세종대왕.
성군으로서 그의 덕성은 영릉에서도 나타난다. 세종대왕 영릉 안, 비각 안에는 선왕의 간단한 업적을 새겨놓은 비석이 있다. 그런데 왕의 업적을 새긴 비석치고는 새겨진 내용이나 형태가 간결하고 소박하다.
재위기간 동안 남긴 세종대왕의 업적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 중 전무후무하다. 우리나라 문명의 토대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위에 세워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종대왕을 성군 중의 성군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의 애틋한 애민정신에 있다. 이에 관해 한국전통조경학회 전 부회장 이창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세종대왕께서는 단릉이나 쌍릉처럼 복잡하게 갖고 있던 릉의 형식을 간편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자기 스스로 소원왕후를 모시면서 최초로 합장릉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하나의 능역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 6천~2만 명이 동원이 되는데 사고도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죠. 그래서 간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셔서 합장릉 제도를 제안을 하셨고 현궁이라고 하여 현실이 두 개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왼쪽에 세종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 소원왕후가 모셔져 있습니다.”
조선왕릉 제향의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옛 방식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도 제사의식이 있었지만 모두 중간에 사라졌다. 왕릉의 원형과 함께 제사의식 또한 온전한 형식으로 보존해 왔다는 점. 그 독창성이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조선왕릉의 능침 형식은 특이하게도 7가지 형식. 마치 오늘날, 다양한 사이즈의 침대처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한 분의 유해만을 모신 단릉이 기본적인 형태이며, 왕과 왕비를 한 봉분 안, 두 개의 석실에 모신 합장릉. 두 분의 봉분을 한 능침공간에 위아래 또는 좌우로 모신 쌍릉. 한 줄기의 맥에서 갈라진 다른 줄기의 언덕에 별도로 배치한 동원이강릉.
왕과 왕비의 능이 같은 언덕의 위아래로 모신 동원상하릉.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삼연릉. 마지막으로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 계비를 함께 모신 동봉삼실릉이 있다.
여러 형태의 능침 배치는 조선왕릉만이 갖고 있는 특이한 양식. 주변 산과 지형을 훼손하지 않고, 주어진 자연조건에 맞췄기 때문이다. 또한 풍수지리 개념에 따라, 서울과 수도권 전역의 최고의 명당에 조성되어 있다.
세종대왕 영릉의 형태는 합장릉.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한 봉분 안에 금슬 좋게 나란히 잠들어 있다. 합장릉이라는 증거는 바로, 봉분 앞에 나란히 놓여있는 두 개의 혼유석. 혼유석은 제사음식을 진설하는 곳이 아니라, 혼이 쉬고 노는 공간이다. 이는 중국에도 없는, 조선 왕릉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세종대왕 합장릉 조성 역시 의궤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봉분 안에는 2개의 격실이 있는데, 그 사이에 48cm 정도의 창문을 뚫어놓았다. 사후에도 왕과 왕비의 혼령이 서로 통하라는 의미다. 돌아가신 부부에 대한 선조들의 배려와 마음 씀씀이가 참 귀하고 아름답다.
효종 임금의 영릉은 동원상하릉. 능침이 위쪽에, 인선왕후의 능침이 아래에 있다. 위쪽의 능침공간이 좁아, 두 분을 다 모시기 힘들어 왕비는 아래에 모셨다. 주어진 자연의 지형을 있는 그대로 활용한 것.
조선왕릉 중 선릉과 정릉 일부분에 도굴 시도가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파괴 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봉분 조성의 원리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먼저 특별한 통로를 통해 관을 봉분 아래 석실에 넣은 후 자갈과 석회를 섞은 반죽으로 메운다. 그 위에 여러 겹의 받침돌을 깔고 마지막으로 혼유석을 설치한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혼유석 바로 아래에는 석실과 연결되는
비밀통로가 있다. 하지만 10톤 가까이 되는 엄청난 무게의 혼유석을 들어내지 않고서는 석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설령 석실로 들어간다 해도 갖고 나올만한 값나가는 부장품이 없다.
조선왕조 21대 왕 영조는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푼 성군이었지만, 아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비정한 아비이기도 했다. 그의 불안한 성정 탓이기도 했지만 당파싸움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 그도, 자신의 능에는 부장품을 간소하게 넣도록 했다.
검소한 봉분 안과 달리, 능침 주변은 비교적 화려하다. 문인석 무인석과 함께 호랑이와 양이 왕릉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양은 선 채 고개를 숙여 땅을 지켜보고 있는데 반해, 호랑이는 잔뜩 웅크려 앉아 있다. 언제든 튀어올라 공격하겠다는 뜻이다. 호랑이 석물은 한반도에서만 유일하게 수호신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석물 밑에는 원추리 풀이 심어져 있다. 이유가 뭘까. 원추리는 요즘도 수면제의 재료로 많이 쓰는 식물. 돌아가신 왕께서 현세의 정치를 잊고 편히 쉬시라는 뜻으로 심었다고 한다.
능침 중간에 배치되어 있는 장명등은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로 등불을 밝히기 위한 석등. 여기에도 우리 조상들의 재치 있는 디자인 감각이 숨어 있다. 장명등 사이로 바라보면 왕릉 건너편에 있는 앞산에 축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자연에 축을 맞췄다는 것이다.
500년 기나긴 왕조의 역사는 온갖 영욕의 세월이었다. 성군의 덕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궁중 암투로 피바람이 몰아치던 때도 많았다.
조선왕조에는 폭군 혹은 폐주로 불렸던 두 명의 군주가 있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그중 연산군은 12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두 번의 사화를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다가 결국 조선시대 최초의 반정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어서도 왕으로서 예우를 받지 못해 왕릉이라는 이름 대신 대군묘로 불린다. 그래서 왕릉의 격식 대신 초라한 묘지로 남았다. 무상하고 쓸쓸한 권력의 뒤안길에 잠든 그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찬란했던 5백 년 왕조의 역사. 한때 최고의 권력과 영광을 누렸던 왕들은 이젠 그저 고요히 볕바른 곳에 잠들어 있는 옛 조상이 되었다.
역사는 박제된 시간 속에 죽어 있지 않다. 오늘, 지금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500년, 파란만장한 역사 이야기를 안은 채 긴 세월 보존되어 온 조선왕릉. 왕조의 역사는 그렇게 한국인의 정신에 뿌리내렸고, 앞으로도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이집트에 피라미드가 있고, 중국에 진시황릉이 있다면, 우리에겐 조선왕릉이 있다. 우리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움과 철학을 갖고 있는 조선왕릉. 지금까지 500년이 넘도록 원형 그대로 보존했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지켜야 할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