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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야만적인 앨리스 씨>

일상화된 폭력

by 윤슬


페친(페이스북 친구) 중에 정신과 의사가 있는데, 얼마 전 이 분이 오랜만에 가슴 뛰는 소설, 소설다운 소설을 읽었다는 포스팅을 보고 대체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해서 이 책을 읽어보았다.


읽기 전에 제목만 보면, 마치 앨리스라는 어느 폭력적인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친엄마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당하는’ 앨리시어(Alice와 분노를 뜻하는 ire의 합성어라고 한다)라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폭력은 앨리시어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이름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과 친구 고미 역시 일상화된 가정폭력 안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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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앨리스는 누구인가?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그 앨리스가 맞다. 동화 속에서 앨리스는 토끼굴로 떨어져 신기하고 재미있는 세계를 경험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앨리시어는 만일 어떤 구멍으로 떨어진다면 그것은 그저 나락일 뿐, 형제에게 출구 같은 건 없다.

어렵사리 친구 고미와 함께 찾아간 가족폭력 상담소에서는 부모와 함께 오라고 한다. 상담사는 말한다. 학생의 부모에게도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 부모 자식 간에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부모와 함께 와서 상담을 받으라고. 그러니까 성인이 겪는 거의 대부분의 갈등이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은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이라는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정신 상담 이론에 기반한 것인데, 매우 소극적이고 게으른 상담이다.

물론 앨리시어의 엄마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한 상처가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의 대물림이 정당화될 순 없다.


어느 날 자신이 엄마보다 힘이 세졌다는 것을 인지한 앨리시어는 엄마에게 복수를 꿈꾸지만, 결국 복수는커녕 동생의 참혹한 죽음을 겪은 후 여장을 한 부랑자가 되어 도시를 떠돈다.


자칫하면 감상에 빠지기 쉬운 내용을 작가는 질척거리는 감정을 배제한 채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문장들로 엮어냈다. 작가는 독자가 감상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한 발 물러서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그럼으로써 오히려 독자는 뭉근한 슬픔으로 이끌려가지만), 그럼에도 폭력에 길들여진 아이들의 거친 언행 속에 드러나는 위악성과, 끝내 비극적인 결말 앞에서 가슴을 누르는 슬픔을 다 제어하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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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며칠 후 OTT 드라마 <피라미드 게임>을 봤는데, 이 드라마 역시 10대 여학생들 사이의 폭력성을 그리고 있다. 이 드라마가 주장하는 것은,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 못지않게 방관자의 죄도 크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도 자식들에게 상시로 폭력을 가하는 아내를 모른 척하는, 방관자 아비가 등장한다.

도처에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 폭력의 가해자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방관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날을 예민하게 세워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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