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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탱크>

희망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걸까

by 윤슬

한때 이런 말이 유행한 적 있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해서 유명해진 말이다. 누구에게나 이루고 싶거나 혹은 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의 절박성이 클수록 그것을 구하는 행위 또한 간절한 모습을 갖기 마련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그것이 기도(혹은 절이나 굿)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어떤 초월적 대상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한 사람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심리적 ‘긍정 회로’를 돌린다(실제로 심리학에서는 원하는 것이 이미 이뤄졌다고 믿거나, 입 밖으로 소리 내서 여러 번 말하면 이뤄진다는 이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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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탱크>는 바로 이러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각자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기도를 하면 이뤄진다는 말을 믿고 ‘탱크’라 불리는 컨테이너를 찾아가 기도를 한다. 얼핏 사이비 종교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지만, 교주도, 교리도 없기에 ‘셀프 기도 시스템’이라는 탱크. 어느 날 이 컨테이너 안에서 기도하던 사람이 자살을 하고, 인근 산에 불이 나면서 컨테이너가 전소된다.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였으나 캐나다인과 결혼 후 더 이상 단 한 자도 글이 써지지 않는 지리멸렬한 삶을 견디다 이혼하고 양육권도 잃고 귀국한 도선,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그녀의 안간힘. 가족으로부터 내쳐진 성소수자 둡둡의 외로움과 절망. 그의 연인 양우와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둡둡의 비극적인 생의 마침표. 컨테이너 기도 시스템 설립자인 황영경의 지리멸렬한 삶과 그에 못지않게 별 희망 없는 그녀의 동생 손부경. 이들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번갈아 전개된다.


책의 뒤표지에 실려있는, ‘어떤 믿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문제였다’는 문장은 이 작품의 시작점이며 앞으로 밀고 나가는 추동력일 것이다.

사실 ‘탱크’라 불리는 그 컨테이너 자체는 결코 신성한 공간이 아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큰 철근 상자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믿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고, 끝내 성취하는 결과들이 나오자 기적의 공간이 된 것일 뿐이다. 마치 구약성서에서 야곱이 베고 자던 돌베개를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자 그것이 성전이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신성이란 어떤 대상에 의미를 부여할 때 획득되는 것이다.


prayer2.png 책에 묘사된 기도하는 장면을 AI로 그려봤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그저 탱크를 찾아 간절히 기도하는 과정에 있을 뿐 아직 뭔가 이뤄지진 않았고, 산에 일어난 화재로 탱크가 전소되면서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간단없이 오갈 뿐이다. 그래서 내게는 소설이 앞으로 전진한다기보다 제자리에서 맴도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기승전결 구조를 갖춘 내러티브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마치 인물들끼리 얽힌 이야기가 8부 능선까지 오르다 갑자기 넘어진 것처럼 보였다. 양우와 도선은 결국 만나게 될까? 만나서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제2의 컨테이너 출현을 막겠다는 손부경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탱크 안에서의 기도나, 그 기도가 이뤄낼 미지의 기적보다, 남은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서로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 아닐까. 그 모습에서 우리는 기도보다 더 실체가 명확한 희망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쓴다’는 소설 속 문장처럼, 죽을 것처럼 힘들고 절망스러워도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것이고 그런 시간들은 결국 과거로 밀려나 우린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커밍아웃한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다 끝내 영영 잃게 된 후 고인 물속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부모. 얼떨결에 게이 퍼레이드를 따라 걷게 된 그 아버지가 허청허청 걷다가 아들의 연인이 우는 모습을 발견하는 마지막 장면이 먹먹하게 가슴에 남는다.


소설 <탱크>는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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