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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세웅 Jul 25. 2021

난이도 조절 실패

이 상황이 만약 게임이라면

어릴 적 나는 롤 플레잉 게임을 즐겨했는데, Lv.1부터 시작해서 간단한 튜토리얼을 거친 후 처음에는 약한 몹부터 제거하며 레벨이 올라갔다. 실제로는 가상의 캐릭터가 레벨이 올라가는 것이었지만, 레벨이 올라갈수록 상대적으로 강한 몹을 잡을 수 있었기에 나 또한 캐릭터에 몰입하며 성취감을 느꼈다. 게임 속 캐릭터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작해서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극복하며 성장하는 게 꼭 우리네 인생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흉부외과 중환자실에는 과 특성상 주로 성인 심장수술 환자가 많지만, 선천적으로 심장병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있기 때문에 소아환자도 있다. 그중에서도 태어나자마자 교정 수술을 해주지 않으면 살릴 수 없는 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수술실로 옮겨져서 수술을 받고 인큐베이터에서 인공호흡기에 숨을 의지한 채 1분 1초를 버티고 있다. 아이가 아프지 않게 재우는 약물을 사용하고, 목에 인공기도를 삽입하고 있으므로 아이라면 당연히 내는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차가운 기계음만 공기를 가득 채운다.


이 상황이 만약 게임이라면 난이도 조절 실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에서도 처음 시작할 때 적응을 돕기 위해서 아이템을 주기도 하고 친절하게 게임하는 법을 설명해주는데, 내 앞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몸보다 큰 기계에 의지한 채 힘든 시간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가혹하게 여겨졌다. 또한 아이의 부모님도 막상 아이는 태어났는데 바로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로 옮겨져 얼굴도 볼 수 없고 안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 청천벽력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유지했던 어머니가, 필요한 물품을 전해주려 중환자실에 오셨을 때 펑펑 우셨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인생의 고난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게 하고 나를 더욱 성숙시키게 하는 힘이 있지만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감당하기 너무 버거운 고난도 있다. 그런 경우는 대체로 시원하게 해결해줄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착잡하고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이미 일상을 잃어버린 아이와, 부모님 앞에서 간호사로서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떠올려봐도 함께 마음 아파하고 아이 곁을 지키며 돌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다시 아이에게로 다가가서, 가슴이 열린 채로 생명이 뛰고 있는 걸 느끼게 하는 심장박동과 더불어 피가 철철 흐르는 아이의 몸에 대고 있던 거즈를 갈아주고, 또 갈아주고 끊임없이 소독해주면서 처참하다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인큐베이터에서 누워있는 아이가 사람의 온기를 느끼는 방법은 비닐장갑, 라텍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의료진의 손길밖에 없었다. 엄마, 아빠의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조차도 당연한 것이 아니고 심장이 제대로 뛰고 숨을 쉬고 먹고 이야기하고 투정 부리고 불평불만을 내쏟을 수 있는 그 모든 순간조차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어려운 상황만 바라보면 원망스럽고, 힘조차 내기 어렵고, 막막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나아가게 하는 것은 함께하는 마음이다. 현재 아이는 극악의 난이도를 경험하고 있지만, 지금 시기를 잘 극복하면 몸에 달고 있던 기계도 하나씩 제거하고, 열려있던 가슴도 닫고, 사용하던 약도 끊고, 산소공급 없이도 숨을 잘 쉬고 밥도 잘 먹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부모님의 눈물과, 의료진의 땀방울과, 아이 스스로 버티는 대견한 순간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쌓여갈 것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상황 속에서 많이 힘들어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서 힘이 되어주고 함께 해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생각한다. 누구든지, 타인을 돕고 함께하는 과정 가운데 인격적으로 더욱 성숙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가슴 벅찬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시선이 나에게만 갇혀있지 않기를, 늘 타인을 향한 여유를 잃지 않으며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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