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혈액형인 줄 알았는데
학창 시절 혈액형에 대한 수업을 들을 때, 항원-항체라는 개념을 배웠다. A형의 경우 적혈구 표현에는 A항원, 혈장 속에는 B항원에 대항하는 항체가 존재한다. B형은 반대이며, AB형은 A, B항원이 존재하고 혈장 속 항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O형의 경우 A, B 항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혈액형에게 수혈 가능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O형이 가장 좋은 혈액형인 줄 알았다.
장기기증과 이식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부터 내 생각은 바뀌었다. 원칙적으로는 혈액형이 같은 경우에만 장기 이식이 가능하다. A형 기증자와 A형 이식 대기자가 매칭 되는 형식이다. 그러나 O형의 경우 예외인데, O형 기증자로부터 수혜 받는 O형 이식 대기자가 없을 경우 다른 혈액형을 가진 이식 대기자에게 기회가 돌아간다. 이 사실만 봤을 때는 억울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각 장기마다 수혜 여부를 선정할 때 사용하는 기준이 있다. 혈액형이 맞아야 하는 게 기본이지만, 심장과 폐 같은 흉곽 장기의 경우 '응급도'라는 변수가 추가된다.
한 해에 이루어지는 뇌사자 심장이식의 경우 150-200건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비해 심장 이식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자의 수는 매년 증가되어 300-500명 정도의 환자분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뇌사 장기기증자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수요는 많다 보니 가장 급하고 필요한 사람이 먼저 받을 수 있도록 기준을 세워두었는데 그것이 바로 응급도이다. 응급한 정도에 따라 0,1,2,3,4로 나뉘어 차례를 기다리게 된다.
응급도 0의 경우 누가 봐도 응급한 상황을 일컫는다. 심장과 폐의 기능을 보조해주는 ECMO기계를 하고 있는 상태라던지, 인공호흡기의 도움 없이는 숨을 쉴 수 없는 환자분들이 그렇다. 이 분들은 심장 이식을 받지 못할 경우 수일 혹은 수주 내에 사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먼저 기회를 받게 된다. 문제는 응급도 1인 경우이다. 좌심실을 보조해주는 장치인 LVAD를 삽입한 환자, 입원하여 강심제를 투여하지 않고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환자분들이 주로 응급도 1인 상태로 대기하고 있다. O형을 제외한 혈액형의 경우, 응급도 0에서 수혜를 받는 사람이 없다면, 같은 혈액형 내 응급도 1 대기자분들에게 기회가 넘어간다. 그러나 O형의 경우 응급도 0에서 수혜 받는 사람이 없다면, 다른 혈액형 중 응급도 0인 대기자분에게 기회가 넘어간다.
이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O형 이식 대기자분들의 대기기간은 다른 혈액형에 비해 상당히 긴 편이다. 혈액형에 관계없이 당장 이식이 필요한 환자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감사한 일이지만, 응급도 1인 O형 대기자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상태가 위독한 응급도 0인 환자분을 나중으로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니 이 문제를 다룰 때마다 조심스럽고, 마땅한 해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만나는 O형 응급도 1인 환자분들께서는 자신보다 더 급한 분께서 먼저 이식을 받는 거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한편, O형만 이런 상황을 겪어야 되는 부분에서는 속상함을 토로하신다. 얼마나 속상하실까 공감하면서도 기약 없는 기다림 앞에 마땅한 해결책이 없어서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다. 같이 고민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모든 순간이 O형 대기자분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