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세웅 Sep 21. 2022

유 선생이 준 도넛 베개

비록 필요 없게 되었지만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로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맡게 된 환자분이 있다. 환자분의 얼굴을 보니 낯익었었는데 내가 흉부외과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고 있을 때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직후 환자분을 케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장과 폐의 기능을 도와주는 기계와 수많은 약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던 환자분이었는데, 이제 기계와 약물 도움 없이도 지내시는 모습을 보니 참 다행이었다. 그러나 몇 달 전 위독한 상황에서 심장이식을 받게 되었던 환자분의 심장 기능은 회복되었지만 장기화된 침상생활로 인해 다리 근육이 많이 빠지게 되었고 결국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게 되었다.


이식을 받게 된 환자의 경우 면역 억제제라는 약물을 평생 복용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식 후 거부반응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쉽게 말하면, 우리 몸의 면역력이 좋을 경우 타인의 장기가 내 몸으로 들어왔을 때 적군으로 인식하여 항체를 생성하고 항체가 이식한 장기에 달라붙으면 장기의 기능부전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거부반응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심장이식을 받은 환자분도 거부반응을 예방하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복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면역억제제 복용을 통해 거부반응을 막는 것은 좋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식 환자가 감염에 취약해지고 상처 회복이 더뎌지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이식 환자의 경우 거부반응도 막으면서 감염에도 걸리지 않게 면역억제제 혈중 농도를 모니터링하며 약물을 조절한다. 같은 이유로, 환자분의 경우 욕창의 회복이 어려웠다. 게다가 입맛이 없으시다며 잘 드시지 못하니 몸의 영양상태도 그리 좋지 못했다. 주치의 교수님과 함께 회진을 참여하며 환자분을 뵈러 갈 때마다 크게 변화가 없는 모습이 고민되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서 환자분과 보호자분을 뵈러 병실로 찾아갔다. '요즘 잠은 잘 주무시는지?', '컨디션은 괜찮으신지?'와 같은 일상적인 물음부터 '가장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와 같은 내면의 상태를 묻는 물음까지. 하루, 이틀 날이 쌓일 때마다 환자분과 보호자분들께서는 점점 마음을 열어주셨다. 불편한 것 중 하나는 병원밥이 입에 안 맞다는 것이었는데, 전자레인지를 돌려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셨다. 이식 후 격리기간이 끝난 상태였기에 그렇게 하셔도 되고 잘 드시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다. 이어서 다른 고민을 말씀해 주셨는데...


"선생님, 욕창 부위가 회복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다리를 움직일 때 좀 아픕니다. 그리고 제가 예전처럼 서서 걸을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정년을 하신 연세, 예전 같지 않은 몸상태, 병원이라는 낯선 환경 가운데 환자분의 처지가 공감되어 마음이 아팠다. 내가 환자분의 입장이었으면 오히려 더 부정적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식이라는 큰 수술을 경험하시고 지금까지 버티신 것도 정말 대단하신 거라고, 상태가 회복되도록 함께 고민해보겠다고 말하며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는 심장 수술을 받은 환자분들의 재활을 돕는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계신다. 물리치료사 선생님께 환자분의 상황을 설명드리고 혹시 병실에 방문하여 재활을 도와주실 수 있으실지 여쭤봤는데 흔쾌히 시간을 내보겠다고 해주셨다. 환자분의 상황에 공감한 물리치료사 선생님은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환자분을 뵈러 가셨다. 며칠 뒤, 환자분을 뵈러 갔을 때 확실히 예전보다는 밝은 모습을 하고 계셨는데, 자신의 회복을 위해 많은 의료진분들이 신경 써주시고 도와주셔서 감동을 받으셨다고 하셨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회복해보겠다는 말씀과 함께.


주말이 되어 밀린 빨래를 하고 장도 보러 갔다. 뭐든 다 있는 매장에 가서 생활 용품을 고르던 중 한쪽 코너에 있던 도넛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욕창 때문에 고생하고 계신 환자분 생각이 났다. 여러 디자인 중 맘에 드는 도넛 베개를 고르고 환자분이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월요일이 되어 준비한 도넛 베개를 선물하려 환자분을 뵈러 갔는데 이게 웬걸, 환자분께서는 주말 사이에 내가 고른 것보다 더 고급스러워 보이고, 좋아 보이는 도넛 베개를 이미 구매하신 상태였다. 조금 더 빨리 드릴 걸이라는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다다익선이라는 말과 함께 도넛 베개를 선물로 드렸다. 이후 환자분은 욕창도 호전되고 기구를 이용해 조금씩 걸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 퇴원하셨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는 심장이식을 받은 환자분들이 퇴원 후 외래진료를 보시고 나서 장기이식 코디네이터와 상담을 할 수 있다. 마침 퇴원한 환자분의 외래진료가 예정된 날이었는데 휠체어를 탄 채 상담을 하러 오신 환자분을 뵙게 되었다. 집에서 잘 지내셨는지, 아픈 곳은 없으셨는지,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검사는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상담이 끝나갈 즈음에 보호자분께서 입을 떼셨다.


"선생님, 남편이 앉아있는 베개가 무엇인지 아세요? 유 선생님이 주신 도넛 베개예요. 집에서도 자주 쓰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 병원 오기 전 새벽부터 찾더라고요. 유 선생이 준 도넛 베개하고 가야 한다고."


그 말을 듣는데 나도, 환자분도, 보호자 분도 활짝 웃었다. 내가 선물해드린 도넛 베개보다 더 푹신하고, 기능이 좋은 도넛 베개가 여럿 있으실 텐데도 유 선생이 준 도넛 베개를 선호하시는 환자분의 마음과 애정이 느껴져서 감사했다. 아직 주변의 도움 없이 걷는 것은 힘든 상태지만 환자분께서는 계속 연습해서 꼭 혼자서 걸어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그 순간이 빨리 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렇게 외래에서 환자분과 보호자분을 뵌지도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약간의 위기가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환자분의 의지와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환자분의 상태는 나날이 좋아지셨다. 여느 때와 다름없었던 외래 상담이 예정되어 있던 날, 환자분께서는 상담하기에 앞서 유 선생님께 보여드릴 게 있다고 하셨다. 곧이어 휠체어에서 일어나신 환자분께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걸어 다니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마음속에 엄청난 감동이 밀려들어왔다. 침상생활이 길어지며 욕창도 생기고 포기할뻔한 순간도 정말 많았었는데,  함께했던 시간이 스쳐 지나가며 마치 내 일인 것처럼 기뻤기 때문이다.


이제는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신 환자분과 함께.


비록 유 선생이 준 도넛 베개는 필요 없게 되었지만, 환자분의 일상을 회복시켜주고 내게도 큰 기쁨을 선물해주었으니 만족한다. 앞으로도 건강한 모습으로 씩씩하게 걸어 다니실 환자분의 앞길을 응원한다.


환자분, 잘 회복해주시고 건강하게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장 억울한 혈액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