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된 일상을 잘 살아내야 한다.
요즘 나의 일상은 출근과 퇴근, 저녁을 먹고 조금 쉬다 보면 금세 잘 시간이다.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다음 날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고 주말을 맞이한다. 처음 했을 땐 어려웠던 업무들도 어느새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 되어버렸고 웬만한 상황들은 대처가 가능해졌다. 잔잔하고 안정적인 일상이지만 그만큼 병원에서 극적으로 다가왔던 보람의 빈도도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보람만을 바라보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환자를 돌보며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병원에서 계속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고민되었다.
일보다 마음이 많이 앞섰을 때는 환자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서 보람을 크게 느꼈지만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다. 반대로 마음보다 일이 많이 앞섰을 때는 차갑고 무뚝뚝하게 환자를 대하는 내 모습에 간호사로서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 환자와의 거리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유지하며 일을 해내는 것이 매일의 과제다. '나는 어떤 간호를 제공할 것인가?'라는 고민 끝에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1%라도 환자를 향한 마음이 더 컸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평소에 주로 마주치는 환자분들은 간절하게 심장이식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 심장이식을 받고 치료받는 분들, 퇴원 후 일상을 지내다가 외래 진료를 보러 내원하시는 분들이다. 그중에서도 심장이식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나는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일을 하기 전까지 장기 이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기다리는 과정은 어떠한지, O형은 왜 이렇게 힘든 혈액형인지, 환자와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한지에 대해서 무지했다. 역시 사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무엇이 문제인지 인지조차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내가 장기 기증과 장기 이식의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배우고, 느낀 점은 뇌사장기기증자로부터 공여받은 장기를 이식받을 수 있기까지의 과정은 예측이 어렵고, 오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며, 수많은 정서적 어려움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나는 또한 장기기증을 결심한 보호자를 만나 상담하기도 하고, 원내에서 기증자가 발생하면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늘 기증자와 가족분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삶의 끝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사랑을 실천하신 그 모습이 정말 대단하고, 누구나 마음은 먹을 수 있지만 아무나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심장이식은 말기 심부전 환자에서 마지막으로 고려할 수 있는 치료다. 말기 심부전까지 진행된 경우는 선천적인 요인, 후천적인 요인이 있지만 대부분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심근병증으로 인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전자와 심근병증간의 관련성이 있음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지만, 그 유전자가 왜 하필 나에게 존재하는지는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답답할 노릇이다.
말기 심부전 상태가 되면 강심제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심장의 기능이 많이 저하되어 있어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몸을 숙였다가 일어나는 것도 힘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장 이식을 대기하는 분들은 입원한 상태로 강심제를 투여하며 이식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거나, 대기 기간이 너무 길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심장 구조적 문제 등이 없다고 판단이 되면 중간 단계로 좌심실보조장치(LVAD, Left ventricular assist device) 삽입술을 고려한다. 그러나 적응증에 해당되지 않는 환자도 있기 때문에 모든 환자가 좌심실보조장치 삽입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년부터 병동에서 심장이식을 받기 위해 입원하고 계셨던 환자 분도 비슷한 경우였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말기 심부전 상태였지만 심장 구조적 문제로 좌심실보조장치 삽입술은 하지 못하고 강심제를 지속적으로 투여하며 하루하루 버티고 계셨다. 환자 분께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여쭤보려 다가갔던 처음 한 달은 환자분이 웃으시기도 하고 씩씩한 모습을 보이셨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나면서 점점 지쳐가는 환자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날 며칠을 계속 보고 있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기다리는 몇 달간 환자분은 나름대로 이것저것 시도해 보셨을 텐데,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고 몸은 계속 힘드니 삶의 흥미가 떨어졌을 것이다. 내가 말주변이 있는 스타일이었으면 환자분께 영양가 없는 말이라도 해서 조금의 웃음이라도 짓게 만들어드릴 텐데 나도 워낙 재미없는 사람이라 별 도움이 되진 못했다. 맨날 똑같은 질문, 변하지 않는 일상 가운데 환자분도 나도 별 기대 없이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증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여러 번 받았다. 각기 다른 곳에서 기증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동안 전국에 심장이식을 대기하고 있는 환자가 많기 때문에 우리 병원에 입원하여 대기하고 있는 환자분에게까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었는데 그날은 달랐다. 전국 병원에서 수혜 신청을 한 후 리스트가 닫혔고 최종 확인 결과 마침내 우리 환자분에게 심장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심장이식팀은 회의를 한 후 심장이식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환자분께 이제 심장이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소식을 전했을 때 아직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당황하던 환자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환자분께 수술 잘 받으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고 마지막 인사를 남긴 채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떠났다.
심장이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환자분의 회복속도도 굉장히 빨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중환자실에서 병동으로 이동하셨다. 격리 기간이 풀리고 환자분을 찾아뵈러 갔을 때 직접 밥도 드시고 강심제의 도움 없이 편안하게 병실을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뻤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 병실을 나서려고 하는데 환자분이 말을 건네셨다.
"고마워서 어쩌지... 기증해 주신 분도, 선생님께도 모두 고마워."
"심장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아내는 것이 기증자 분의 뜻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의료진에게도 큰 기쁨이니까 우리 잘 회복하는 것에 집중해 봐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말의 어조, 분위기, 눈빛에서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환자분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잔잔한 감동이 내게 밀려왔다. 반복적인 일을 하는 일상에 파묻혀 정작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놓치고 살았었는데 내게 주어진 반복된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야 말로 환자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큰 고마움과 사랑으로 다가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크고 특별한 일을 해내는 것도 좋지만, 내게 주어진 작은 일부터 진심을 다할 때 곧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람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