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날에 부쳐

죽음이란 친구와 결별하고 싶다.

by polisopher




죽음은 친구와 같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경찰은 ‘사망’이라는 사태를 너무 쉽게 만나버려. 스스로 한 것이든 타인에 의한 것이든.

몇 달 전 영양서 피습 사건의 분노와 공포의 범벅이 게시판 벽을 칠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마르기도 전에 다음 동료의 죽음이 붉은 풀에 발려진 채 그 위에 덕지덕지 붙었어.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심하기 마련이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나봐. 누군가의 죽음이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지고 있다면 말이야.

반추해보면 불과 10센티미터의 틈을 두고 나와 자동차가 교차했던 기억들이 있어. 이런 ‘10센티’는 삶과 죽음의 경계. 내게 찾아왔던 죽음은 정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누가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지. 치... 나는 생생히 기억하는데. 내 눈 앞에서 어느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대사처럼 번뜩이던 칼날이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데.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죽어야 하는 거지? 언제부터 이런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거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쳐들어온 것도, 홍타이지가 쳐들어온 것도 아니잖아.

누군가 가르쳐 주더군. ‘경찰은 위험한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그래서 예고 없이 일찍 죽을 수 있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죽음 앞에 초연해질 필요가 있다더라고.

그런데 죽음 앞에 초연해질 수 있기는 한 거야? 경찰이 부처야?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야? 경찰은 욕망의 동물일 뿐이잖아. 초연? 젠장 그딴 거 집어 치워.

으레 이런 일이 터지면 나오는 명령 알지? ‘단속이나 사고 수습할 때 안전 하라’. 언뜻 들으면 디게 고마워. 근데 이 안에는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비밀이 담겨 있어.

검거하고 단속하고 범인을 잡는 일이란 말이지, 맞아. 위험한 일이지. 따라서 두려워. 기억해봐. 제복을 입고 첫 단속, 검거하던 때를. 어때 지금은 좀 나아졌어?

누군가는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묘한 쾌감을 느낀다고도 하더라마는 착각이야. 그저 다치지 않아서, 살았다는 안도감일 뿐이거든.

어떤 경찰은 청심환을, 누구는 신경안정제를, 누구는 폭식과 폭음으로, 누구는 격한 운동 또는 문화 예술을 즐기며 이 공포를 희석시켜. 뽀인트는 희석이야. 사라지지 않지.

이 희석제 같은 게 바로 ‘안전하게’야. 듣고 보니 신경안정제와 소리가 비슷하군. 그렇다면 다칠 수도 죽을 수도 있는 현장에서 저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데?

칼날이 번뜩이는 싸움판 그리고 레이서들이 폭주하는 트랙에 서서 사고를 수습할 때, ‘죽음의 사자가 넘보지 못하게 하라’ 라는 의미야.

그런데 여전히 다치고 죽는 일이 생겨. 죽음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잖아. 매번 말하는데도. 그렇다면 ‘안전 하라’는 명령은 뭐가 되는 거야? 다쳐도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겐가.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 침통해서 그래. 네이버는 말해 안전이란 ‘위험이 생기거나 사고가 날 염려가 없음’이라고. 즉 ‘위험 ZERO 상태’인거지. 그런데 경찰은 위험하잖아.

그니까 ‘안전하게 단속하고 사고 수습하라’는 걸 들추어 보면 ‘사고가 날 염려 없는 위험한 일’이라는 실체, 즉 모순이 드러나. 지혜로운 어르신들은 ‘같지 않은 말’이라고도 하지.

그 안에 숱한 죽음을 보고도 덤덤하게 된 비밀이 있던 거야. ‘죽을 수 있지만 죽을 위험이 없다는 설교’ 그렇게 15만이 안전하지 않은 ‘안전하라’의 도그마에 빠져 버린 셈이지.

알아. 안전을 강조하면 실제로 안전할 수도 있어. 일단 움츠려 들테니까. 하지만 잊으면 안 돼. 죽음이란 놈. 오늘 피했다고 쉽게 포기하지 않아. 무척 정교한 놈이거든.


ㆍ대한민국 파출소 경관ㆍ18.10.21ㆍ


◇ 대한민국 현장경관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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