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경찰이 부딪힌 사실과 거짓의 경계
신임경찰 300기의 첫 시뮬레이션
by polisopher Oct 26. 2019
내가 맡은 신임 300기의 첫 시뮬레이션 훈련이 있었다. 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쓰레기 투기ㆍ무전취식 등의 경범죄 위반 상황을 제시하면 경찰 후보생들은 각각 위반자ㆍ경찰관의 역할을 해주면 되는 것이다.
오전 훈련에 참여한 피해자 캐어팀은 심리상담 전문가들인 만큼 전반적으로 차분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치열한 심리전도 보여줬다. 반면 저항하는 이들에게 업어치기도 불사할 만큼 다이내믹했던 특공대의 오후 상황을 보며 등골 서늘한 현장의 단면을 보기도 했다.
삶이 고달픈 중년 남성役에 몰입 중인 신임경찰, 그는 아들뻘 되는 경찰들에게 큰소리 내다가 술을 못이겨 주저앉는다. 이때 다가 온 경찰이 핫팩을 건네며 위로하고 있다. (c)대파경
범칙금 3만 원을 피해보려는 양아치 같은 변호사, 밥 한 끼 낼 돈 없어 무전취식해야 하는 수험생, 직장을 잃어 처지를 비관하는 누군가의 아버지, 이들을 상대로 어르고 달래며 굽신거리다가도 때론 날카롭게 신경전을 벌이는 경찰, 신임 경찰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충분히 젖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행동을 보며 냉정한 피드백을 해야 했지만 아랫입술을 잘근 씹을 만큼 웃음을 삼키기도 하고 때론 안타까운 사연에 먹먹해질 정도로 그들과 그 상황 안에 동화되고 있었다.
실은 강의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웃었고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이상하다. 잠시 두어 걸음 물러나 냉정하게 살펴보면 강의실에서는 사실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실랑이가 있었고 욕설과 함께 격정적인 충돌이 있었으며 박장대소와 뭉클함도 있었다. 무엇이 사건 현장이고 모의 현장이란 말인가.
진중권 교수가 쓴 '미학 오디세이'에서 우리는 원본과 복제품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에 살고 있다고 읽은 것 같다. 가령 고흐가 그린 오리지널 작품이 있지만 그 복제품은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원본이든 복제품이든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 차이를 나누는 게 희석된다. 우리의 가상 훈련도 그랬던 것 아닐까.
수업을 마치고 복도에서 만난 몇몇 후보생들은 아직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저 웃음과 제스처, 더 이상 시뮬레이션이 아님을 안다. 누군가의 삶을 보았고 사람 냄새를 맡았을 테니. 그 순간 그들은 정말 경찰이었으니까.
ㆍ대한민국 파출소 경관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