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22017
잠은 더 이상 청할 필요도 없이 충분한데 눈을 뜨기가 여간 귀찮아 정신은 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체처럼 사소한 움직임도 없이 몇 시간을 눈을 감고 누워있고 싶은 때가 가끔 있다. 그리고 그게 오늘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장장 네 달간 평일 하루 꼬박 다섯 시간씩 들었던 편집디자인 수업이어제서야 끝이 났다. 무언가를 끝냈다는 게 오래간 만이라 보람이라는 걸 느껴보는 것도 아주 잠시였고 공허함이라고 해야 하나? 막막함? 어떤 특정 단어를 끌어다가 지금의 감정을 정의하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그저 하나의 단어로 단정 지으라는 건 무의미하다. 또 불가능하다. 그 단어에서 분명 얽히고 설켜 있는 감정의 일면도 느껴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긴장이 풀린 건지 복잡한 생각을 머리 속에 새롭게 그려가다 보니 뇌가 휴식을 요청한 건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발을 벗고 코트를 벗어 쇼파에 던지듯 내려 놓고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양말도 벗지 않았고 뒤통수 위로 높게 하나로 묶은 머리도 풀지 않았다. 청바지도 후드티도 벗지 않았고 이불을 들고 안으로 몸을 집어 넣지도 않았다. 아침에 잘 정돈하고 나간 하얀 이불 위로 투신하듯 누웠다. 그래. 방전이다. 지금 내 감정을 정의할 수 없어도 나의 상태는 얘기할 수 있다. 일단 자야지 일단.
이런 때가 자주 찾아오면 생체리듬에 좋지 않다고. 내가 만약 이 얘기를 엄마에게 한다면 곧바로 녹음기에서 들려 오듯 그녀에게서 흘러나올 말을 생각해 봤다.
규칙적인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래서 내가 너 혼자 나가 산다고 할 때 알아봤다
아무리 그래도 밥은 먹고 누워야지
아휴 이걸 어떡하면 좋아
얘를 누가 데려가
너 그러다 병 나
아니 왜?
나의 기억력이 아직 쌩쌩해서 엄마가 내뱉은 말들이 자연적으로 꼬리를 물고 물어 머리 속에서 리스트가 만들어지는건지, 삼십 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해오며 잊혀지지 않을 만큼 충분한 반복 리스닝이 된 건지 확신은없다. 그래도 왼손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기가 어디 갔냐며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요즘의 나에게는 왠지후자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
리스닝이 이렇게 중요했나
반복적인 게 이런 효과를 가져오는 건가.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몸이 알고 머리가 반응하고 마음이 따르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도 있겠다. 반복이 창조해 낼 수 있는 건 그럼 뭐가 있지
1만시간의 법칙이라는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던 때 꽤나 인기몰이를 했던 책이 떠오른다. 지금은 어렵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분야를 이해하고 전문성을 띨 수 있다고 했다. 1만시간을 반복적으로 같은 분야에서 보낼 수 있다면 내가 <앤디 워홀>이 될까.
본인이 정말 언어에 소질이 없다고 얘기하는 <조(영국에서 만난 이성친구)>에게 “너는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잖니?”라고 살짝 질투가 난다는 투로 위로아닌 위로를 건넨 적이 있다.
“당연하지, 그건 내가계속 써왔으니까.”
수십 년을 듣고 말하고 보고 읽어나가는 반복적인 시간 동안에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그래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장점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을 봤다. 당연하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어떠한 것도 특별하지 않은 존재로 색이 바래버린다. 기념일마다 선물을 챙기고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순간 그들의 정성과 노력, 희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 더불어 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은 더이상 자신에게 베풀지 않는 사람을 비(非)정상으로 받아들인다. 이와 더불어 자신이 가진 장점을 바라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와 비교하여 스스로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해 단점이라고 단정짓는 순간, 빛나지 않는 자신을 마주하고 그 모습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슬픈 일이다.
매일 아침 여섯 시 이전에 일어나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것도 일 년에 적어도 오십 권의 책을 읽는 것과 횟수로 5년 째 미루지않고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것, 잊어버리지 않고 또 최신 어휘를 구사함에 뒤쳐지지 않으려 꾸준히 영어와 일본어로 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 일주일에 최소한 다섯 번은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내 손으로만들어 먹는 것,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서점에 들리는 것, 또나를 행복하게 하는 시간을 위해 마음이 이끌리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비정기적일 수 밖에 없는주변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적어도 몇 년 간은 꾸준히 행동하고 있는 것들을 나열해 봤다. 내게는당연한 것, 이제는 나의 일상이자 아무 것도 아닌 보통의 행동들을 활자로 표현하고 나니 적어도 내게 있어 나의 삶이 조금은 <특별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