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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Apr 21. 2017

와인 마신 노트북의 최후




독일이라는 나라를 무심코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물론 와인 보다는 맥주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구수하게 톡 쏘는 라거(Lager) 맥주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자기 전에 하루를 마무리하며 또 한 잔의 맥주를 목 넘기며 잠드는 사람들이 독일인이다……라고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요즘 같으면아마 한국의 ‘소주’를 아는 외국인들은 “한국사람들은 모두가 소주를 즐겨”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궤변이다. 어찌됐건 애주가와 독일이라는 술독의 만남은 알코올 향이 살짝 코 끝을 울려대는 하루하루다. 그런 내게도 와인을 멀리하게 되는 상황이 나타나다니.



한국에서 가져온 노트북, 엄밀히 말해 랩탑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고개만 돌리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PC방은 한국을 떠나면 더 이상 흔하지 않다. 거기에 보태어 지난 달부터 내가 슬슬 시작한 일은 온라인으로 80%가 넘는 업무를 PC로처리해야 하기에 일명 ‘랩탑이’와 나의 사이는 더욱 애절하고 끈끈해 진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사물이 주인을 닮아가는 걸까. 



나의 노트북, 영원히 잠들다

어느 아침, 잠에서 깨니 가슴 속에 괜한 허함이 느껴진다. 무언가 거대한 것을 놓치고 가는 느낌이랄까? 집세를 내지 않았나? 방문을 열어둔 채로 잠이 들었나? 뭘까. 그러던 중 코끝을 스치는묵힌 포도 향이 느껴진다. 으응? 어제 밤에 한 잔 가볍게마시고 잔 와인 병이 뉘어져 있다. 나는 분명 세워두고 잔 거 같은데. 뉘어진 와인 글라스의 주둥이는 살포시 펼쳐진 랩탑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안감은. 랩탑이가 주인을 닮아 와인을 마셨다. 코를 랩탑의 키보드에 갖다 대본다. ‘아, 망했다.’


랩탑은 하루를 서늘한 자연풍에 건조시켜 보아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 눈앞이 캄캄하다. 독일에서 구입하지 않은 가전 제품의 A/S를 처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전 마트인 콘라드와 자툰에 랩톱을 들고 찾아갔지만 매장에서 직접 구입 했음을 증명하는 영수증이 없으면 수리가 불가하다는 야속한 이야기만 들려왔다. 고민 끝에 결국, 나는 빠르게 한국에 특송 우편으로 보내 수리를 받고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오는 걸로 생각을 정리하고 신속하게 한국행 비행기에 태워 보냈으나. 더 이상 나와 랩탑이의 만남은 없었다. 와인 한 잔을 삼킨 랩탑이의 메인보드 전체가 부식되어 회생 비용이 랩탑 두 대는 살 수 있는 금액이라나 뭐라나. 운이 좋아 회생을 하더라도 노트북 안에 축적해둔 나의 뼈와 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자료들은 복구가 될 수 없음에 보랏빛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이별의 슬픔도 잠시, 하루 빨리 새로운 랩탑이가 필요한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가전 마트로 향해야 했다.


자툰(Saturn), 미디어마크트(Mediamarkt), 콘라드(Conrad). 자툰이 우리나라의 <하이마트>처럼 가장 규모가 크고 종류가 다양하나 신용카드결제가 불가하다는 아쉬움이 있어 그나마 신용카드로 구매할 수 있는 콘라드로 들어갔다. 남자와 여자의 전자 제품을 구매하는 관점의 차이는 엄청나다. 성능과 디자인, A/S여부등의 다각도의 검토 끝에 구매로 이어지는 남자들의 세계와 달리, 단순히 디자인, 가격 등으로 별도의 고민 없이 제품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게 나와 같은 보통의 여자들이 아닐까 싶다. 나도 지극히 평범한 여자의 전자제품 구매 패턴으로 매장 안을 둘러본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계산대로 향한다. 




“카드가 결제가 되지 않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한번 더 확인해 주세요.”

“……”

“카드가 결제가 되지 않아요. 다른 카드나 현금 없나요?”

“……다른 카드는 없어요. 그럼현금을 인출해서 다시 올게요.”

“좋아요. 그러나다시 결제 할 때 당신은 계산대에 줄을 다시 서서 기다려야 해요.”


독일에 꽤나 많은 상점에서 자국에서 발급한 신용카드가 아니면 승인을 처리하지 않는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우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한국에서 발급한 신용카드는 정말이지 거금을 결제해야 하는 곳에서는 십중팔구 승인 거절이 난다. 왜이리 매장에 가전제품을 사겠다고 기다리는사람들이 많은지. 계산대에서만 멍하니 서서 사십 여분을 기다린 것 같은데 카드 결제에 문제가 생겨 어쩔수 없이 현금을 뽑아와야만 했다. 아, 나란 여자.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운이 안 좋다 안 좋다 할 때에는 정말 하루 종일 비효율과 따분함의 연속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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