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로 편지 쓰기를 내었다.
2주간의 말미를 주고.
수신인은 엄마.
그러고 아차 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정혜 씨도 있고,
지난겨울 초입 엄마를 잃은 지은 씨도 있는데
나 혼자 흥에 겨워 숙제를 내주고서야
아차 싶었다.
숙제를 취소하거나 대상을 수정하기 위해 말을 꺼내려다 두 사람을 보았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안 봐도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아, 나는 엄마이면서, 딸 같은 사람들 앞에서 이리도 일을 철없이 벌일까,
혼자 머리를 쳤다.
이왕 나간 숙제,
에라, 지들도 부모이고 어른인데 그것쯤은 감당할 수 있어야지,
언제까지 엄마엄마 하며 살 건데
억지춘향으로 나 혼자 수습했다.
자식이 엄마에게 편지 쓰기가 그리 어려울까,
어렵다.
두 주를 흘려보내고 마감 하루 앞둔 날 저녁에서야 몇몇 사람의 편지가 도착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그리워요, 죄송해요, 아쉬워요---
네 글자 라임을 맞춰 쓰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을 고르고, 생각을 고르고
숙제니까, 남들이 읽을 테니까
말도 자주 만나야 할 게 많은 것처럼
편지도 자주 써야 쓸게 많은 법인데
뜬금없이 그저 편지를 쓰자니 쓸 말이 무엇이 있을까 싶기는 했다.
숙제로 낸 편지를 읽으며 내 딸들을 떠올렸다.
그 애들도 편지 쓰기가 어렵기는 한 가지,
생일 때나, 어버이날이나 되어야 서너 줄 적힌 카드를 보내온다.
사랑한다, 고맙다고 적어 보낸 몇 줄 안 되는 말에
나는 내 감정의 양념을 듬뿍 얹어 읽는다.
그 애들의 사랑의 농도나 감사의 질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열 배 혹은 스무 배, 그 이상의 감정을 입혀 카드를 읽는다.
아이들이 보낸 편지는 차곡차곡 모아놓는다.
글자를 모르던 때, 그림으로 쓴 카드까지도 꼬박꼬박.
아이들 펀지는 짧은 글로 시작해서 한 살 한 살 더하는 나이만큼 길어졌다.
고등학생 때, 깨알 같은 글씨로 길이로나 내용으로나 정점을 찍고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그 애들은 몇 줄 안에 말을 욱여담느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인간이 되었다.
다시 길어지는 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느 무료한 날, 편지를 꺼내 읽고, 편지를 읽다 앨범을 꺼내 보고
앨범을 보다 그 애들이 쓴 일기도 읽어본다.
그 애들의 명랑한 목소리를 입혀서.
내가 딸들의 편지에 감동을 입혀서 읽는 것처럼 내 학생들의 어머니들도 그렇게 읽을 것이다.
그러니 편지를 나무라지 말 일이다.
편지의 독자는 누가 뭐래도 그들의 어머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