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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Aug 02. 2020

2020.7.23

코로나 일기

제천도서관으로 출강하던 때가 있어요. 시간이 꽤 흐른 이야기지만 제천 지역 학교도서관 학부모 봉사자를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했어요. 1년 동안 매주 한 번씩 같은 길을 갔다 왔지요. 3시간 수업을 하기 위해 왕복 4시간을 길에서 보냈습니다. 그래도 제천 가는 길에서 만난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제철마다 다르게 아름다워, 훗날 이런 곳에서 평화롭게 살아야겠다, 즐거운 상상을 하고는 했어요. 오가는 길에 책이나 한 권 읽어야겠다 생각하고 들고 가지만 한 글자도 못 읽고 오는 날이 많았어요. 차창 밖으로 저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그걸 안 보고 책을 읽는 일은 미련한 짓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적지 않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으면서도 고단함보다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천은 서울보다 한 달은 늦게 봄이 오는 것 같아요. 서울 벚꽃이 다 졌을 때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제천은 그때 한창이었어요. 제천으로 가는 차창밖으로 스치는 산과 들의 봄빛이 도시의 봄과는 달랐어요. 도시의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봄과 달리 순하고 여린 것들이 만들어내는 제천의 봄빛에 보는 마음도 순결해지는 듯했어요. 1년 중 초록이 가장 아름다운 5,6월. 얼마나 다양한 층위의 초록이 있는지,  그 많은 초록을 세상에서 처음 보는 듯한 환희를 주더라구요. 매미소리가 소란스러워질 무렵 방학을 해서 9월, 다시 시작된 제천 가는 길은 여전히 싫증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 사이 달라진 풍경들, 시골은 계절과 시간이 지나는 게 눈에 보입니다. 지루할  틈이 없어요. 


눈이 내린 겨울날이었어요. 서울에서 보기 힘든 눈이 그곳은 지천이었어요. 내린 눈이 녹기도 전에 또 새 눈이 내리니 겨우내 눈덮인 산 골짜기를 볼 수 있었지요. 하얀 눈 덮인 골짜기가 아름다우려면 무엇이 더 있어야 할까요? 한가롭게 거니는 노루가족이 있으면 어떨까요?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 마리 노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산골짜기에서 저 산골짜기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거다, 카메라를 세우고 고대하던 그림을 기다리던 사진사의 심정이 그와 같을 까요? 새벽부터 서둘러야하는 일정이 고단한 길이지만 고단하지 않았어요. 오직 카메라에 담아두지 못한 걸 아쉬워할 뿐, 앞으로 달리는 차와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노루가족, 모든 그림은 순식간에 지나갔지요. 


다음 주 수업시간에 골짜기를 건너던 노루가족 이야기를 안 할 수 있습니까? 그림같은 풍경이더라, 사람들은 내가 감동을 실컷 하도록 기다려 주었어요. 그리고 나서 한 분이 말하는 거예요. “선생님, 산짐승들이 선생님이 애써 키운 감자며 고구마, 옥수수 같은 농작물 절단내는 것을 보시면 속이 터질 거예요. 그래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몇년을 기른 인삼을 파헤쳐 뽑아놓고 못 쓰게 갉아먹은 걸 보시면 환장할 거예요.” 충청도와 강원도 특징 둘 다를 품고 있는 제천 사람의 느릿하고 수더분한 말투, 그러나 곡식을 기르는 사람의 웅숭 깊은 눈빛과 마주친 순간 내 마음속 아름다움이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더라구요. 


 남들이 자식을 키우는 모습 보는 일은 달리는 차창밖으로 펼쳐 보이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원풍경 같아요. 차를 타고 지나는 사람의 눈에는 농사를 망치는 노루가족이나 멧돼지조차 아름다운 한폭의 픙경으로 보이는 것처럼 남의 집은 풍경으로 보입니다. 노루가족이 뭡니까, 산짐승이지요. 코로나 때문에 등교 대신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하는 아이들과 하루종일 부딪기느라 우리집 아이들이 산짐승 같지요? 남의 집과 달리? 천상병 시인은 인생은 한바탕 소풍같다고 했지만 하루하루를 사는 건 소풍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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