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이 진지한 일기
기록을 보니 지난 7월 15일 이후로 하루 종일 해가 쨍쨍하게 빛났던 날이 없다. 흐리고 비 오기를 반복하면서 유난히 더울 거라던 기상청 예보와 달리 비교적 선선한 채로 여름의 절반을 지났다.
지난 20여 일 간 심각한 폭우로 피해가 극심했다는데 나의 활동 반경 안에서는 심각성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내려다보는 집 앞 공원의 나무는 어제보다 더 푸르렀고 배롱나무 꽃들이 어제와 다름없이 환하게 피어있었다. 동네 화단엔 맥문동과 원추리, 옥잠화, 분홍 바늘꽃이 큰 비에도 줄기가 꺾이거나 쓰러지지 않고 피고 지고 있었다.
작업을 하기 위해 pc를 켜면 부팅 화면에 보이는 가보지 않은 먼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클릭하면서 무심히 보고는 했다. 다른 게 있다면 언제 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조차 접었다는 것뿐. 코로나는 종식되지 않으며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져 여행을 갈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짧아도 2,3년 이후나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는 말을 들어서일까.
유례가 없는 큰비로 산사태가 나 가옥이나 펜션 등을 덮쳐 사상자가 생기고 물길을 다 받아내지 못한 하천의 물이 넘쳐 침수된 농경지에서 자라는 채소며 과실 등 온갖 농작물이 누런 진흙탕을 뒤집어쓴 사진을 보면서도 인간의 일을 걱정하느라 사나운 날씨가 자연에 미칠 타격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다 요 근래 내 마음을 붙잡는 일이 있어서 그 일에 매달려 지내느라 아침마다 지저귀던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일 년 치 강수량을 단 며칠 사이에 넘겼다는데 사나운 물살에 벌레와 작은 동물의 터전이 다 휩쓸려 갔을 것이다.
홍수로 여러 종류의 생명들이 끔찍한 상황에 빠져 있을 것이다. 한강 둔치도 물에 잠기고 사람의 통행을 막은 지 여러 날인데 그곳에 사는 생명들은 어쩌고 있을지. 한강 둔치에 사는 고양이들을 돌보던 청년과 노인이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고양이가 안전한 곳으로 옮기도록 조처를 했을까? 이제야 생각나는 것들이 많다.
지난주 일요일엔 성당을 다녀오다 쏟아지는 비를 처연히 맞으며 먹이를 구하는 까치를 보았다. 제법 여러 마리가 젖은 날개를 펴지 못해 토끼처럼 강종 거리고 있었다. 먹이가 되는 벌레며 풀씨가 이 비에 온전할 리 없다. 까치인들 먹이가 눈에 쉽게 뜨일 리 없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아침마다 소란스럽게 우짖던 직박구리 소리도 들리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그러다 오늘 아침 비가 그치고 모처럼 파란 하늘이 구름 사이로 보여 반가운데 직박구리까지 날아왔다. 반갑다.
한 번은 직박구리를 기다려 베란다 선반에 모이를 놓았다가 비올 때 치우는 걸 깜빡 잊는 바람에 못 먹게 되었다. 나무들이 자라면서 벋은 가지가 베란다 선반까지 닿는 덕분인지 가끔 직박구리가 날아와 앉았다 가고는 해서 혹시나 하고 먹이를 놓아두었는데, 그게 그렇게 부실하기 짝이 없다. 비가 갠 틈에 다시 새 먹이를 내놓았다. 땅콩과 호두를 잘게 부순 것과 잡곡밥을 지을 때 조금씩 넣는 좁쌀을 섞어서 바람에 모이 그릇이 날아가지 않도록 베란다 선반에 단단히 묶어 놓았다. 기다리던 직박구리 대신 어치가 왔다. 어치는 사나운 녀석이다. 가만 살펴보니 직박구리 두 마리가 먼 나뭇가지에 앉아있다. 이 근처에 자주 나타나던 녀석들인 것 같다. 녀석들은 어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어치가 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비 그치고,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해까지 나고, 기다리던 직박구리도 날아오고. 비록 어치가 차지하고 있으나 기다리는 새는 아닐지언정 내가 준 모이를 먹으러 날아온 새들이 반가운 아침이다. (202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