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패티 Oct 05. 2021

세 엄마의 기다림

그림책에 물들다



어머니의 기다림 (1)


오래 전의 일이 되었어요. 동창 모임이 있어 어머니가 사시는 집과 우리 집 가운데 쯤 되는 동네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있었지요. 그날 점심을 산 친구의 점심을 사게 된 내력을 둘으며 떠들썩하게 웃는데 아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너를 여기서 보는구나. 잘 지내지?"

어린 시절 이웃에 살면서 어머니와는 형제처럼 지내던 분이었어요.

"올라갈 때 엄마 뵙고 갈 거지?"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 분이 아니었더라도 온 김에 어머니를 뵙고 갈 계획까지 있었지요. 점심을 산 친구의 고난 극복기를 들으며 이제 좋은 날만 있을 거다, 축하하며 웃고 떠들다 보니 시간이 제법 기울었습니다.

 

고3이 된 작은애의 응급 전화를 받고 친구들에게 아쉬운 인사를 하고 곧장 집으로 오는 고속도로를 탔을 때였어요. 어머니의 전화가 온 것은.

"얘, 섭이 엄마가 네가 들렀다 간다고 해서 너 주려고 뭐 좀 싸놨는데, 언제 오니?"

 사실, 어머니가 그닥 멀리 떨어져 사시는 것도 아닌데 무얼 그리 바쁘게 사느라고 전화만 드릴 뿐 찾아 뵙는 게 어려웠어요. 아니지요. 어머니를 뵙는 일보다 먼저 할 일이 늘 생겼어요. 집 근처까지 왔다니 이번엔 꼭 들릴 것이라 해서 기다리셨던 어머니의 언제 오느냐는 전화였어요.

나는 차마 고속도로라서 차를 돌리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데, 눈치 빠른 어머니가 먼저 말씀하셨지요. 당신이 볼 일이 생겨서 내가 간대도 못 기다릴 것 같아서 전화하셨다는 거예요. 조금 전에 뭘 싸놓고 기다리셨다면서, 어머니 거짓말이 허술하게 들통났지만 저는 짐짓 어머니 사정을 봐드리는 것처럼 그럼  내일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어머니는 속으로 '작것, 온다고 말이나 하지 말지!' 하시지  않았을까요?



어머니의 기다림 (2)


"어머니, 이번 주말에 내려갑니다."

나는 주말에 일을 보러 자신이 나고 자랐으며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을  출장 가는 남편을 따라 나도 간다고 어머니께 연락을 드렸지요. 어머니는 시간이 되느냐, 긴 얘기는 전화비 나오니 와서 하자, 조심해서 오라는 말씀을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요금 많이 나오니 급한 게 아니면 짧게 통화하고 내려오거든 얘기하자고 전화를 끊는 것은 어쩌면 어머니가 평생 지키신 습관 같은 것이었어요.

자식을 어려워하셨던 어머니가 자식의 일상을 존중해서, 당신 일로 자식에게 누가 되지는 않고자 하셔서 입에 배어 습관처럼 하셨던 말이 93세 별세하시기까지 말로 끝나고 말았어요.

토요일 아침 첫 기차를 타고 부지런히 내려가서 얼른 볼일을 보고 어머니를 뵈러 가자, 의견을 맞추었지요.


일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어서 계획대로만 되지 않았음은 짐작한 대로입니다.  점심이 기울고 3시 쯤 되었을 때였을 겁니다. 11월 짧은 해가 어설픈 시간이었어요.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것은.

"와, 안 오노?"

전화기 너머서 들리는 어머니 음성이 전화기 바깥으로까지 흘렀습니다.

그때 다시 전화기 너머서 형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가 아들 기다리는 기쁨으로 일주일을 사셨다. 아직 멀었나? 얼렁 온나."

전화 한 통 자주 못 드려도 왜 전화조차 없느냐 기다림을 내색하지 않으시던 어머니가, 아들이 온다는 날로부터 일주일을 기다리시고도, 몇 시간을 더 못 기다리셔서 전화를 하신 겁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기다렸던 몇 시간이 얼마나 길고 지루한 것이었을까요.

한번 성이 나면 들쑤셔 놓은 벌집처럼 수습이 불가능한 것이 기다림입니다. 제풀에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어머니의 기다림, 셋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는 간결해서 더 간절한 기다림으로 읽힙니다. 크리스마스와 케이크가 구워지기를 기다리던 어린 아이가 자라서 연인을 만나고, 사랑하고, 입대해서 참전을 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다니고, 몇 차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내 보내고, 새 식구를 맞고, 손자의 탄생을 기다리기까지 주인공은 한평생을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각각의 기다림 끝에 맺어진 인연은 빨간 끈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끈은 끊어질듯 위태위태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구 엉켜서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기도 하지요. 그러는 사이 기쁨도 슬픔도 시간과 함께 흐르고, 가슴 졸이던 순간이며, 더 이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침묵같은 시간도 같이 흘러갑니다.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진 문장들은 빨간 색 실을 따라  단선으로 전개되었지만 읽는 이의 삶이 그 선 위로 함께 흐르며 가볍고 가늘지만은 않은 빨간 실이 됩니다.


"저 이제 퇴근해요. 패티 씨, 뭐하고 계세요? 오늘 저녁 메뉴는 뭐예요?"

퇴근 시간 무렵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 우리를 기다리던 부모님의 기다림을 내가 이어받은 듯  자식의 전화를, 문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루를 잘 건사하고 돌아와 종달새처럼 하루일과를 나열하는 자식의 목소리를 기다리고는 합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하이케 팔러 <100인생 그림책>(사계절)

다비스 칼리 글, 세실리아 페리 그림<지금은 인생>(오후의소묘)

노인경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문학동네

아주라 다고스티노 글, 에스테파니아 브라보 그림<눈의 시>오후의소묘



 


매거진의 이전글 겁내지 말고 말을 하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