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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Nov 22. 2021

노년의 삶에 필요한 것

쓸데 없이 진지한 일기


몸으로 배운 것은 몸에 새겨진 것이다.



어제는 목공예를 배울 수 있는 곳에 체험을 다녀왔다.  내가 만들 물건은 보물함, 보석함이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상당히 크다. 보석으로 가득 채우려면 아이들 장난감 가게라고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예상이 빗나간 나를 선생님이 눈치 채고 보석함이 아니라 보. 물. 함이라고 천천히 말한다. 가로 23cm 세로 15cm 높이 15cm 짜리 보물함이다. 



소나무 보물함 재료와 완성품



무늬를 생각하며 6면을 맞춰보고 못질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목공 본드로 미리 귀를 맞춰 붙여놓은 다음 녹슬지 않는 못(스테인리스 못)을 박아 상자 모형을 잡아놓는다. 다음, 나뭇결무늬를 살리고 나무 거스러미를 틀 사포로 다듬고 갈아낸다. 이어서 전기 인두로 무늬를 그려 넣었다. 보물상자 만들기는 오염이나 해충 등으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 오일을 바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네 귀를 꼭 맞게 교정 중


망치질을 하며 생각했다. 거듭될수록 점점 더 리드미컬해지는 망치질을 하면서 몸으로 배운 것은 몸에 새겨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 오래돼서 다 잊고 있은 줄 알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토끼장을 만들 때 아버지가 하셨던 이야기도 생각났다. 못이 똑바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 잘 들어가게 하는 방법, 조금 비뚤어졌다고 못을 빼서 다시 박지 말고 망치질로 교정하는 방법도 일러 주셨다. 못 자국은 지워지지 않으므로 처음부터 잘해야 한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지만 작은 실수는 망치질로 교정할 수 있다고 하셨다. 어제는 드릴로 미리 못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주었지만 아버지는 못에 침을 바르거나 기름을 조금 발라 서 못질을 하면 잘 들어간다며, 못에 침을 바르는 시범을 직접 해 보이시기도 했다. 망치질 소리와 함께 못에 침을 바를 때 맡았던 쇳내의 비릿한 냄새까지 다시 생생하게 살아왔다.





어릴 때 집에서 토끼와 개를 길렀다. 강아지일 때는 집안에서 함께 생활했다. 심지어는 이불 속에 데리고 자기도 했으나 토끼는 아무리 어려도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요새야 별별 동물들을 집안에서 기르지만 내가 어릴 때는 집안에 들일 수 있는 동물은 강아지가 유일했다. 밖에서 지내야 할 토끼를 위해 토끼장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때 나는 이미 톱질이며 망치질, 대패질, 사포질까지 해봤다. 토끼가 새끼를 낳아 수가 늘어나면 토끼장을 더 만들고는 했는데, 부모님은 토끼가 자라서 성묘가 되면 제각각 집을 지어주었다. 덕분에 토끼장을 여러 번 만들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목공 체험을 한 셈이다. 토끼를 여러 마리 한 집에 지내지 않게 한 것은 번식을 막기 위한 조처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꽤 오랫동안 토끼를 길렀는데,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기른 토끼는 우리들의 겨울 식탁에 오르기도 했다. 생일이나 설날에나 고기를 먹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노년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한다.

노년기를 보내기 위해 우선 무엇이 필요할까. 관심을 가지면 보이기 시작한다.


어른을 위한 그림책 에세이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무루)읽다가 작가의 의견에 공감한 부분을 발견했다. 40대인 듯한 작가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라디오 책방에서 방송을 하면서 노년의 삶에 필요한 세 가지로 호기심, 유머, 품위를 꼽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동진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은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하게 되었다는데, 작가가 꼽은 것은 자신 명의로 된 작고 아름다운 집과 튼튼한 관절, 그리고 명료한 정신이다.



베로니트 드 뷔르의 <체리토마토파이>의 주인공 잔 할머니는 아흔 살 봄에 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잔할머니는 시골에 외딴 농가에 혼자 산다. 별일 없는 날을 살면서 그날그날 기분을 기록하고 문득 떠오르는 추억을 적기도 한다. 노인의 특권은 시간이 많다는 것,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을 무엇을 하며 채울 것인가. 잔 할머니는 자기 집 정원에서 피어나는 꽃을 친구를 불러 보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벤치에 누워 하늘의 별을 보기도 하고.



일기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쓴 이옥남 할머니는 강원도 산골에 홀로 살면서 농사를 짓고 일기를 쓰며 산다. 잔 할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


북토킹 중인 이옥남 할머니 




코로나 때문에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 이후 내가 처음 맞닥뜨린 곤란은 시간 보내기였다. 일하기가 일과의 중요한 항목인 채로 평생을 살다 갑자기 일에서 놓여난 시간을 감당하지 못해 곤경에 빠졌던 경험이 노년의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했다. 무엇보다 혼자 시간 보내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 절실했다. 박물관도 미술관도 여행도 쇼핑도, 동네 카페 나들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때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가. 돈과 시간과 건강과 친구가 있어도 소용없는 시간. 그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워낙 가난하게 자라서 가난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국민학교 동창이 있었다. 부지런히 일한 성실함이 하늘에 닿아서인지 나이 쉰 살 즈음부터 벌인 사업이 잘 돼 제법 큰돈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는 내게 이제 일이라면 신물이 난다며 내게 일 대신 너처럼 시간 보낼 지혜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 애가 보기에 내 삶이 신선 같아 보였을까. 아무튼 나는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가 물었다. 피아노 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럼 피아노를 배워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하고 싶은 것, 일이 아닌 것을 하라고 했다. 그로부터 1년이나 흘렀을까. 동창 모임을 그 애 집에서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 근교의 별장 같은 집을 상상하며 도착한 집은 살림집이 아니라 음식점이었다. 소머리국밥집. 그래도 카운터에서 우아하게 우리를 맞겠지 했던 마지막 상상도 틀렸다. 친구는 붉게 달은 얼굴로 주방에서 나왔다.


"얘,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 거더라."


친구는 내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을 들려준 셈이었다.





사진: https://yoon0923.tistory.com/entry






사람들에게 노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를 물었다. 그들이 꼽은 것은 돈, 건강, 친구였다고 한다. 꼭 세 가지여야 한다면 나는 친구를 빼고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게 시간 보내는 방법을 넣고 싶다.




망치질을 하며 몸이 배운 것을 생각했다. 몸이 배운 것은 몸에 배었다는 뜻이다. 나이 들어서 갑자기 피아노 앞에 앉은 우아한 사람이 되기는 어려운 것처럼 몸에 밴 습관대로 살게 된다. 더 늦지 않게 준비할 것은 늙어서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무엇,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면서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무엇에 습관을 들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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