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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골라담듯 골라담은 시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by 김패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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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좋은 시는 많지만, 막상 고르려고 하면 막막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누군가 친절하게 골라 모아놓은 시를 읽는 즐거움은, 종류별 아이스크림 중에 좋아하는 맛만 골라 담는 즐거움과 같다. 안도현 시인이 엮은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은 그런 즐거움을 안겨준다. 특히 고향, 어머니, 생명을 다룬 시들이 그렇다. 게다가 시가 좋아 시를 좋아하게 하지만 해설이 좋아 그 시를 좋아하게도 한다. 이 책은 해설이 좋아 시를 다시 읽게 한다.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 (---) 후줄근한 중고품 /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조말선의 ‘고향’)


조말선 시인은 떠나온 고향을 '벗어놓은 낡은 은 외투'에 비유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는 구절은 고향이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떠나온 후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시간의 흔적임을 말해준다. 그 외투가 '후줄근한 중고품'이 된 것처럼, 고향은 시인보다 더 빠르게 늙어버렸다. 고향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흔적이자 빛바랜 기억으로 남게 되는 이유다.


“목백일홍이 붉게 타오르는 수돗가에서 / 끝물인 아비가 늙은 오이 한 개를 따와서 씻고 있다”(문성해의 ‘여름끝물’)


늦여름의 텃밭을 아는 사람은 그 심란함을 안다. 오이와 토마토는 줄기만 남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그 자리를 채운다. 문성해 시인의 '여름끝물'은 이 모습을 삶의 끝자락에 비유했다. "끝물인 아비가 늙은 오이 한 개를 따와서 씻고 있다"는 구절은 더 이상 거둘 것이 많지 않은 텃밭처럼, 삶의 황혼기에 다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어 깊은 울림을 준다.


SNS에서 시골에 사는 어떤 이가 '끝물 오이'와 함께 수확한 늙은 호박 사진을 올렸다. "애호박이 늙은 호박이 되었다. 나도 그렇다"는 짧은 글이 마음을 울렸다. '결실'이라기보다 '끝물'이라는 단어가 더 가슴에 와 닿는 시간이다. 풀을 뽑고 지주를 다시 세우는 등 밭을 새롭게 단장하기에는 거둘 수확물보다 들어갈 품이 아까운 때가 늦여름의 텃밭이다.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어설픈 때, 그 마음이 절실하다. 삶도, 여름도,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지나 끝자락에 다다르면 이처럼 애상을 남긴다.


“그대 기척 어느덧 지표엣 휘발하고/저녁하늘/바다 가까이 바다 냄새 맡을 때쯤/바다 홀연히 사라진 강물처럼/황당하게 나는 흐른다./하구였나 싶은 곳에 뻘이 드러나고/바람도 없는데 도요새 몇 마리/비칠대며 걸어 다닌다/(---) 흘러온 반대편이 그래도 가야 할 곳,/수평선 있는 쪽이 바다였던가?/혹 수평선도 지평선도 여느 금도 없는 곳?// (황동규의 ‘더 쨍한 사랑노래’ 부분)


황동규 시인의 '더 쨍한 사랑노래'는 제목과는 다르게, 사랑의 찬란함보다는 상실의 아픔과 그 흔적에 집중한다. 사랑이 원래 그렇다. 함께 있는 동안보다 떠난 후에 더 진하다. 그런 상실을,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강물이 사라진 하구'에 비유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척이 사라진다는 것은 함께 흘러온 시간에 '쨍'하고 금이 가는 것과 같다는 안도현 시인의 해설은, 강이 바다에 스며들 듯 사랑의 상실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달래준다. 그럼에도 사랑의 끝에서 느끼는 아픔과 상실감,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움을 담은 이 시, '더 쨍한'이라는 제목은 사라져버린 사랑의 찬란함이 남긴, 선명하고 아픈 흔적을 의미하는 역설이다.


“뒤뜰 풀섶/몇 발짝 앞의 아득한/초록을 밟고/키다리 명아주 목덜미에 핀/메꽃 한 점/건너다보다//문득/저렇게/있어도 좋고/없어도 무방한/것이//내 안에 또 아득하여,//키다리 명아주 목덜미를 한번쯤/ 없는 듯 꽃 밝히기를/ 바래보는 것이다//(이안의 ‘메꽃’)


이안 시인은 '메꽃'이라는 무심한 존재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내 안에 또한 아득하여'라는 구절은, 스스로를 메꽃처럼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고 느끼는 마음을 드러내고. 하지만 여기서 좌절하는 대신, 시인은 메꽃처럼 존재하기를 바란다. '없는 듯 꽃 밝히기를 바래어 보는 것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화려하게 드러나기보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박하고도 깊은 소망을 담고 있다.


안도현 시인은 명아주 줄기에 감겨 있는 '메꽃 한 점'을 보며, 시인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고 감상한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히 핀 메꽃, 거기서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시인의 시선이 따듯하다.


이 책에는 성인 시뿐 아니라 동시를 쓰는 이안, 청소년 시를 쓰는 박성우 시인의 작품까지 폭넓게 담겨 있다. 박성우 시인의 '소년에게'는 마치 한 편의 고전 영화를 보는 듯하다. "소년이여, 작은 창 열고 나와 소녀에게 목도리를 둘러주어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자전거 뒤에 소녀를 태워주던 낭만적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소년이여, 작은 창 열고 나와 소녀에게 목도리를 둘러주어라 여름부터 와 있었을 소녀에게 스웨터를 내주어라 행여라도 털장갑은 내주지 마라 소녀를 자전거 뒤에 태워 그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게 하라”(박성우의 ‘ 소년에게’)


책의 말미에는 시의 여운을 이어주는 그림과 짧은 글이 담겨 있어 감동을 더한다. 65편의 시들은 그립고, 애틋하며, 사랑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다시 읽어도 좋고 새로 알게 되어 더 좋은 시들을 만나게 해 준 이 책을 통해, 시를 읽는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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