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지옥편'
솔직히 고백하자면,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추천하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700년 전에 쓰인, 그것도 중세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장편 서사시라니. 예전에도 읽다 포기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읽기로한 책이니, 여전히 '고전하며 읽는 책' 고전이 맞았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좀 나았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지 이유를 알겠다. 단테는 당대의 신학, 철학, 정치, 역사, 신화를 모조리 집어넣은 것 같다. 한 페이지를 읽으면 주석을 세 페이지는 봐야 했다. 이건 시가 아니라 중세 지식 백과사전이었다.
'신곡'이 탄생한 1300년대 초반의 이탈리아는 교황파와 황제파로 나뉘어 끊임없는 정치적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피렌체는 이러한 당파 싸움의 중심지였고, 단테 자신도 교황파에서 흑파 백파로 갈린, 백파에 속해 정치 활동을 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흑파의 승리로 1302년 영원한 추방형을 선고받으며, 그는 다시는 사랑하는 고향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단테의 개인적 비극이 '신곡'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옥편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부패한 교황, 배신자들, 타락한 정치인들—은 단테가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유배자가 겪는 고통과 분노, 그리고 정의에 대한 갈망이 이 작품의 모든 곳곳에 녹아 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안내자로 삼는데, 베르길리우스는 이성과 고전 학문을 상징한다. 그러나 천국에 다다르려면 베아트리체로 표방되는 신앙과 은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던 당대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후대 사람들은 르네상스를 잉태한 시대 상황을 담았다고 보았다.
또한 지옥은 9개 층으로 구성되어 정교한 죄의 위계를 보여준다. 죄는 단순히 종교적 계율 위반이 아니라, 이성적 질서에 대한 반역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바로 중세 후기의 시대정신 즉,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이 통합되던 시대, 즉 르네상스의 문을 열기 직전의 모습이다.
정교한 죄의 분류 체제
단테는 지옥을 아홉 개의 원으로 나누고, 각 원마다 다른 죄인들을 배치한다.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죄가 무거워지는데, 특히 주목할 점은 폭력보다 사기와 배신을 더 무거운 죄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를 악용하는 죄를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중세의 윤리관을 보여준다.
대조법의 원리(콘트라파소)
각 죄인이 받는 형벌은 그들이 지은 죄와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운명의 예언자들은 머리가 뒤로 돌아가 앞을 볼 수 없다. 기가막힌 상상력이다. 앞을 내다보는 예언자가 영원히 뒤만 보고 가야하는 벌이라니. 또한 위선자들은 겉은 황금빛이지만 무거운 납옷을 입는다. 이러한 '시적 정의'는 단순한 응징을 넘어 죄의 본질을 시각화한다.
정치적 예언과 비판
단테는 작품 곳곳에서 동시대 정치인들과 교황들을 지옥에 배치하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특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비판은 가차 없다. 이는 문학이 단순한 예술을 넘어 시대에 대한 강력한 발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존했었는데, 이렇게 실랄하게 비판했다는 것인데, 당시에는 비판의 대상이 된 인물들의 후손들이 불만을 표하거나, 단테의 책이 위험하다고 여겨지기도 했단다. 하지만 《신곡》이 가진 예술적 힘과 도덕적 무게감 덕분에 단순한 비방으로 치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곡'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스-로마 신화, 기독교 신학, 중세 이탈리아 정치사, 고전 철학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수많은 인물들과 은유들이 그저 낯선 이름의 나열로만 느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단테가 "구이도 다 몬테펠트로"(27곡)라는 인물을 만나는 장면은, 당시 피렌체의 정치 상황을 모르면 그 의미를 절반도 이해할 수 없다. 주석 없이 읽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좋은 번역본과 해설서가 필요하다.
'신곡' 이전에도 지옥을 묘사한 작품들은 있었다. 하지만 단테만큼 구체적이고 생생하며, 동시에 체계적으로 지옥을 그려낸 작가는 없을 것 같다. 단테의 지옥은 그야말로 상상력의 한도초과다.
제9옥의 얼어붙은 코키토스 호수에 박힌 배신자들, 끓는 피의 강에 잠긴 폭군들, 불타는 무덤 속의 이단자들—각각의 형벌은 잔인하면서도 기묘하게 아름답다. 특히 지옥의 최하층, 루시퍼가 세 개의 입으로 유다, 브루투스, 카시우스를 씹어 먹는 장면의 공포는 압도적이다.
이러한 지옥은 중세 사람들에게 실재하는 진리였지만, 현대의 우리에게는 상상력의 극한을 보여준다. 단테는 추상적인 죄와 벌의 개념을 구체적인 육체적 고통으로 번역해냈고, 그 번역은 7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를 전율하게 만든다. 우리가 영화 등에서 볼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의 지옥이 여기 다 있다.
'신곡' 읽기는 쉽지 않다. 방대한 배경지식, 낯선 중세적 세계관, 때로는 잔혹하기까지 한 묘사들. 하지만 단테의 어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단테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징작할 수 있다.
신곡은 단순히 죄인들에 대한 죄의 기록장이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할 수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타락으로부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장대한 명상이다. 지옥을 통과해야만 연옥으로, 그리고 천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구조 자체가, 고통을 통한 정화와 구원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담고 있다.
유배자 단테는 지옥 여행을 통해 자신의 시대를 심판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성찰했다. 7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시대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며, '신곡'이 여전히 읽혀야 하는 이유라면 이유다. 그러나 차마 읽으라 권하지는 못하겠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지옥편 1곡(민음사)
지옥의 문턱에서 시작된 단테의 여정은, 결국 모든 인간이 걸어야 할 구원의 길에 대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