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안긴 대작보다, 반쪽짜리 산문이 들어온 날

모닥불과 개미

by 김패티


활활 타고 있는 모닥불 속에 썩은 통나무 한 개비를 집어넣었다. 통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타오르자 나무통에서 개미들이 떼를 지어 쏟아져 나왔다. 한 무리가 통나무 뒤쪽으로 달리다가 불길에 휩싸여 타죽어 갔다. 나는 황급히 불붙은 통나무를 모닥불 속에서 끌어내었다. 생명을 건진 개미들의 일부가 모래 위를 달려가고, 더러는 소나무 가지 뒤로 기어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미들은 좀처럼 불길을 피해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불길을 피해 나갔던 개미들도 방향을 바꾸어 다시 통나무 둘레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그 어떤 힘이 그들을 내버린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일까. 많은 개미들은 활활 타오르는 통나무 뒤로 다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통나무에 붙어서 그대로 타 죽어 가는 것이었다.


-'모닥불과 개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






sweden-1101497_1280.jpg?type=w773





스무 살 무렵 읽은 짧은 글 하나가 있다. 솔제니친의 '모닥불과 개미'였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통나무를 불 속에 넣자 개미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개미는 도망갔고, 어떤 개미는 타 죽었다. 그런데 살아난 개미들이 다시 불타는 통나무로 돌아갔다. 그리고 함께 타 죽었다.



그저 그런 관찰 기록이 아니었다. 글은 생생했다. 개미가 모래 위를 달리는 모습이 보였고, 소나무 가지로 기어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통나무를 빙빙 맴도는 모습까지.



그날 이후 개미를 다르게 보게 되었다. 그냥 벌레가 아니었다. 고향을 찾아 돌아가다 죽는 존재였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리는 생명이었다.



최재천 교수는 이 글로 과학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했다. 나는 그저 책을 더 읽게 되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펼쳤고, '암병동'도 읽었다. 수용소 이야기들이었다. 혹독했다.



하지만 모닥불과 개미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 긴 소설보다 짧은 산문이 더 오래 남았다. 통나무로 돌아가는 개미들이 자꾸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지 모른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돌아가는 곳이 있다. 타 죽을 것 같아도 떠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고향이든, 사람이든, 기억이든.



개미는 왜 돌아갔을까. 아직도 모른다. 다만 그들도 선택했다는 것은 안다. 살기 위해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추측한다. 개미들이 불타는 통나무로 되돌아간 이유는 아마도 여왕개미 때문이 아니었을까.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런 현상을 설명했다. 개미들의 이타적 행동도 결국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이기적 전략이라는 것이다. 개체는 희생하지만 유전자는 살아남는다. 최재천 교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개미들의 행동을 이타성의 사례로 다루었다.



도킨스의 이타심은 생물학적 개념으로, 인간의 이타심과는 다르다. 개체가 자신의 생존이나 번식 가능성을 희생하면서 다른 개체를 돕는 행동을 말한다. 하지만 그 근본 원인은 유전자의 이기적 전략이다. 설령 여왕 개미 때문에 돌아갔다 해도, 개미가 여왕을 위해 죽는 것은 인간처럼 의식적 선택이 아니라 유전자에 프로그래밍된 본능이라는 것. 결과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진화한 행동이다.



그때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만 개미의 선택이 어리석은 일인지 숭고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선택을 본 스무 살의 나는,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게 되었다.



한 편의 짧은 글이 노벨상을 안긴 대작보다, 반쪽짜리 산문이 더 깊이 들어왔다. 지금도 모닥불을 보면 솔제니친의 개미들이 떠오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성과 집, 집으로 본 한 여성 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