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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Mar 20. 2019

상상력은 아이들의 밥이다

그림책에 물들다 | 비가 오는 날에

비 오는 날의 즐거운 상상비가 오는 날에 | 이혜리 그림 정병규 글 | 보림

        

비가 올 때 동물들은 무얼 할까    


  비 오는 날, 나가 놀지도 못하고 엄마 무릎에 누워 책 읽기도 싫증이 날쯤, 비가 올 때 동물들은 무얼 할까 하는 아이의 상상놀이가 이 책의 주요 내용입니다. 


예측불허, 상상불허. 내 생각은 비를 대하는 다양한 동물들의 천진하고 재미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아이에 의해 유쾌하게 깨지고 말았지요. 언젠가 텔레비전으로 본 동물 다큐에서 처연하게 비를 맞고 섰던 얼룩말이 떠오르고 멈춘, 비로 인해 겪을지도 모를 불편을 더 오래 생각하는 식상하고 정형화된 저의 상상이 흔들렸습니다. 


 세상에, 세찬 비바람을 뚫고 길을 나섰다가 우산이 날아갈까 봐 붙들고 쩔쩔매는 치타라니. 목을 뒤로 젖히고 함지박처럼 입을 벌려 퍼붓듯 쏟아지는 빗물을 마시는 사자, 첨벙거리며 물장난을 치는 티라노사우르스와 동굴에 턱을 괴고 엎드려 심드렁한 표정으로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 호랑이,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며 비를 흩뿌리는 용······. 비를 대하는 동물들의 모습이 기발하고 다양한 상상이 즐겁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치타는 무얼 할까?"

 "우산이 날아갈까 봐 꽉 붙잡고 있지."


사자는? 호랑이는? 티라노사우르스는? 나비는?---. 

비 오는 날 엄마 무릎에 누워 쏟아지는 비를 보며 아이는 호기심을 끝 간데 없이 펼칩니다. 


치타, 사자, 티라노사우르스,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물장난을 한다는 아이의 상상은 비를 우선 불편하게 생각하는 어른과 달리 아이의 천진한 놀이에서 비롯합니다. 책 속 동물들이 비를 맞는 모습은 흔히 비 오는 날 아이들이 보이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아이들은 동물들이 친근하게 느껴지겠지요?


 ‘우산이 날아갈까 봐 꽉 붙잡고 있’는 치타는 세찬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을 활짝 펼치지도 못한 채 머리만 겨우 가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저런 모양으로는 당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곧 우산에 가려진 치타의 얼굴을 상상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렵습니다.


 죽죽 쏟아지는 비를‘목이 말랐는데 잘 됐구나, 하고 실컷 물을 먹’겠다며 입을 쩍 벌리고, 빗물을 받아먹는 사자는 더는 백수의 제왕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가 혀를 내밀고 빗물을 받아먹는 모습이지요. 비 오는 날 빗물이 흘러내리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어 보다 창문을 조금만 열고 마침내 손을 내밀어 손바닥에 떨어지는 빗물의 느낌을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이 장난스런 사자의 모습에 겹쳐집니다.


  날개가 젖을 까봐 깨금발로 살살 걸어가는 나비란! 빗물이 방울방울 맺힌 풀섶길을 걷는 여자 아이 모습이 떠오릅니다. 빗물에 젖을까봐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뒤꿈치를 들고 살살 걸어가는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 말입니다. 앙증 맞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공룡을 좋아해서 이름을 줄줄 외지요. 그러나 간혹 공룡을 잘 모르는 아이들이라도 친숙한 공룡, 티라노사우르스. 사나운 육식 공룡이지만 물장난을 치는 티라노사우르스의 개구진 모습은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첨벙거리며 한나절 즐겁게 놀았던 장난감 티라노사우르스와 닮았습니다.


  언제 비가 그치나, 기다리며 배를 깔고 누워있는 호랑이에게 산중의 왕 다운 기상은 없습니다. 호랑이 모습에서 어서 비가 그쳐서 밖으로 나가 놀고 싶은 아이의 심정이 읽혀 큭큭 웃음 짓게 합니다. 집안에서 할 수 있는 다른 놀이도 있을 텐데 오직 비가 쏟아지는 모습이 보이는 창문을 맥없이 바라보며 어서 비가 그치기를 투정하듯 기다리는 아이 말입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용이 무얼 하긴, 비를 뿌리지. 이 비를 뿌리는 이, 그가 용이었다니!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빗줄기가 어지럽게 흩날린 이유가 거기 있었군요. 헤엄치듯 꿈틀거리듯 이리저리 빗물을 흩뿌리는 용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게 장난스럽습니다. 화려하고 장엄한 권력을 상징하는 용이 아닙니다. 불을 뿜는 대신 발톱 사이로 빗물을 뿌리는 모습에 왕다운 권위가 어이없이 무너집니다. 


  비가 점점 더 많이 오네. 하늘이 더욱 낮아지고 어두워지네. 검은 먹칠을 더한 구름 사이로 번쩍 번개가 치는데, 아빠는 지금 무얼 하고 계실까? 무거워지는 구름과 굵어지는 빗줄기를 어떻게 하지. 장난스럽던 동물들도 천둥과 번개는 무섭지요. 


 그러나 두려움과 걱정도 잠시 아빠는 동물들과 함께 우산을 뒤집어서 만든 배를 타고 구름바다를 건너 오고 계시네요. 아빠 손에 높이 든 선물을 보아라, 아가야. 모두들 ‘이히히’ 웃으며 귀가 중입니다. 


  이 유머! 빗물을 거두고 구름을 걷어내는 해님을 토해내는 용, 젖은 몸을 말리느라 가죽을 벗겨 우산대에 매달아 말리는 치타, 제왕답게 지휘봉을 잡고 선 사자, 뱃머리에 느긋하게 큰 대자로 누워 나비를 희롱하는 티라노사우르스, 그리고 뱃놀이를 손뼉 치며 즐기는 호랑이와 그들 가운에 서 계신 아빠까지. 내로라하는 존재들의 농담 같은 모습에 박장대소하게 합니다.   

           

비의 표정


 책을 읽으면서 비에도 표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연필선의 굵기와 강약, 방향과 흐름으로 다양한 비의 표정을 담았습니다. 선긋기 놀이라도 하는 듯 빗줄기를 그려댑니다. 독자는 비 내리는 모양과 느낌이 말이 없이도 이처럼 다양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비는 동물들 외에 이 책의 또 하나의 주요 등장인물입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각양각색의 느낌과 모양과 소리를 담은 비가 내립니다. 수직으로 가만히 내리는 비, 휘날리는 비, 장대 같은 비, 억수로 내리는 비, 살금살금 내리는 비, 책장을 넘기면서 계속되는 화면에 가득 내리는 비는 망설임도 조심성도 없다가 멈칫하듯 가늘어지다 굵어지고, 쏟아지다 흩날리고는 합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비는 질주하는 치타를 닮았습니다. 기다란 사선을 그리며 내리꽂는 비가 얼마나 세찬지는 우산에 부딪쳐 튕겨나가는 빗방울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룩주룩 대나무 숲처럼 곧고 굵은 비, 사자와 닮은 장대비입니다. 굵은 크레파스로 죽죽 내리그어 만든 비의 숲, 몸집이 커다란 동물이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밀림입니다. 


 소곤소곤, 간질간질 내리는 비는 나비의 날갯짓을 닮은 는개비입니다. 이파리에 모여서야 비로소 구슬 하나 만드는 비, 나비의 날갯짓에도 흩어지고 말 것만 같습니다.  


 찌릿찌릿, 투룩 탁. 투루룩 툭, 이쯤 되면 이 비는 누구와 닮았을까 상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지요.‘티라노사우르스는 무얼 할까’ 글을 읽으며 공룡을 상상한 기발함에 무릎을 칩니다. 첨벙첨벙 장난치는 공룡을 닮은 비, 금방이라도 우산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 공룡의 놀이에 동참하고 싶게 하는 비입니다.


  빽빽하게 비의 장막을 치며 쏟아지는 억수는 호랑이를 닮았습니다.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신령스러운 호랑이를 품기에 알맞은 장막 비입니다. 동굴 속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심드렁하게 엎드려 있는 모습은 호랑이 체면을 깎는 일이므로 내 보일 수 없습니다. 


  흩뿌리는 비, 굵기도 가늘기도 양도 일정하지 않은 비, 물뿌리개로 유리창에 뿌리는 듯한 비는 구름 속에 숨어 장난을 거는 용을 닮았습니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실눈을 뜨고 장난을 치는 개구쟁이의 장난질 말입니다. 

 구름이 더욱 낮게 내려와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아빠가 걱정됩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데 아빠는 무얼 하고 계실까? 콰르르릉 거리는 천둥소리와 이리저리 몰려다니듯 쏟아지는 비는 아빠가 돌아오실 길을 더욱 걱정하게 하지요.


  동물과 비, 그 외의 어떤 장식도 없는 그림, 덕분에 독자는 비와 비를 대하는 동물에게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화가는 비와 비 냄새만 표현하고자 다른 것들은 절제했다고 말합니다.     

       

어린이의 상상과 현실 


 어린이의 상상 세계와 현실 세계는 하나로 이어져 이 둘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 듭니다. 어린이는 상상을 통해 현실의 부족함을 채우기도 하고 상상을 현실을 연습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는 현실과 상상의 공간을 색깔을 달리하여 경계를 지어 놓았습니다. 비가 오는 현실의 공간은 푸른빛이 도는 회색으로, 상상의 공간은 같은 회색 바탕에 색깔을 조금씩 넣어 변화를 주어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여겨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색을 입혔기 때문에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명확히 갈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아이들의 특성을 이해한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엄마와 아이가 “이렇게 비가 오는 데 oo은 무얼 할까?”“무얼 하긴 oo하지”처럼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는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책에서 반복하여 사용되는 언어는 즐거운 상상과 함께 경쾌한 리듬감을 줍니다.    

 어린 독자와 엄마가 함께 이 책을 읽는다면 아이가 좋아하는 동물을 더 불러와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같은 구조로 묻고 답하는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동물의 습성과 아주 잘 어울리는 빗줄기도 그려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아빠가 나오는 장면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어요. 비 오는 길을 아빠가 안전하게 돌아오시기를 고대하는 어린아이의 마음 말입니다. 아빠는 구름 위에서 비에 젖지 않고 뱃놀이를 하듯 즐겁게 귀가하는 중입니다. 그것은 아이의 바람이기도 하지요.



그림책을 덮으면 뒤표지에 엄마와 아이가 소파에 앉아 아빠의 귀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 그림으로 이제까지의 모든 정황을 알 수 있지요. 저렇게 오는 비를 뚫고 오실 아빠를 기다리며 나눈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지요. 


  아이의 상상으로 불러온 동물들은 아이의 친구들입니다. 동물들의 장난스런 모습이나 개구진 행동은 아이 자신이며 행동이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현실만큼이나 상상도 생생한데, 아이가 일상에서 겪는 일이 곧 생생한 상상으로 다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의 삶에는 현실과 상상이 공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양하고 풍성한 경험이야말로 아이를 풍요로운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밑천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 오는 여름 날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아이들은 무엇을 상상할까요? 상상력이야말로 아이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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