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위로는 왜 속편한 소리가 되었을까

[타인을 듣는 시간]을 읽고

by 폴라리스

우리는 특정 시기를 ‘중2병’이나 ‘잼민이’ 같은 말로 가볍게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21살에 겪는 ‘대2병’도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갓 미성년자를 벗어난 스무살 초입에는 자칫하면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성숙해졌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 무서운 건, 그 시절이 지나고 난 뒤에 찾아옵니다. 그 시기를 지나고 있는 타인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지나가면 그만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른 중반이 된 지금은 이 병이 더욱 말기로 진화했다고 느낍니다. 타인의 아픔을 내 범주 안에 담아낼 수 있다는 오만으로 말이죠. 그래서 누군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항상 담담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 침착한 이면에는 ‘내가 답을 내려줄 수 있다’는 자만과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계몽주의적인 마인드가 있습니다. 상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듣기보다, 컨설턴트처럼 효율을 따지며 재단해온 셈입니다.


“타인을 듣는 시간”이라는 제목과 다큐멘터리 PD라는 저자의 이력을 보고는 그저 이 책이 다양한 이웃의 삶을 조명하는 인터뷰집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한 쪽씩 넘기면서 깨달았습니다. 나의 뻔뻔한 얼굴에 끼얹어진 찬물 같은 독서 에세이라는 걸요. 이 책은 타인의 고통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며 그 아픔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하는지 처절하게 묻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상대방에게 “슬픔을 느끼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 빨리 의미를 찾고 빨리 극복해야해’라고 곧잘 조언하곤 했습니다. 실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내뱉는 속편한 소리였었죠.


심지어 누군가의 고민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그래서?’라는 냉소적인 물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입으로는 공감하는 척하지만, 실은 상대의 감정에 전염되거나 감정 쓰레기통이 되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외면이었죠. 물론 나를 보호하려는 이 방어기제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전함의 추구 때문에 이해는 더더욱 요원해집니다. “이해는 내 자리를 떠나 타인의 맥락 안으로 들어가는 위험한 이동이다.”라는 책의 내용 처럼, 안락하고 안전한 위치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건 내가 힘들어질 수도 있는 무모한 도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러미 프로젝트”라는 다큐멘터리 희곡 챕터가 유독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 희곡은 레러미라는 마을에서 혐오 범죄로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연극은 그 사람들의 고통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거나 섣부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대신 연극 단원들이 직접 그들의 삶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그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무대 위에 올리는 방식을 택합니다. 대사 하나 조차도 바꾸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인터뷰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말입니다. 철저한 타인이었던 단원들이 자발적으로 슬픔과 책임을 나누어 짊어집니다. 어떤 세련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그저 그들의 곁에서 고통을 함께 목격하는 자세를 선택합니다.


헨미 요의 “먹는 인간”에는 체르노빌로 돌아가 방사능에 오염된 버섯과 돼지고기를 먹으며 살아가는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효율적이고 현실을 따지는 외부인의 상식으로는 당장 그만둬야 할 위험하고 잘못된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평생 살아온 이들에게는 안전한 곳으로 이주해서 식습관까지 바꾸는 것을 마음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타인의 맥락을 무시한 채 내리는 ‘정답’은 그들에게 ‘해답’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흔히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상실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이 말은 때로 가혹한 정답입니다. 정신과 의사 노다 마사아키는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 라는 책에서 애도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처절한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를 안고 현실을 살아내는 건, 그 어떤 부업보다 고된 추가 노동인 것이죠.


결국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거짓말일지도 모릅니다. 나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감히 타인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오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상대방을 ‘독립된 타인’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타인’이라는 선언이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 상대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게 하는 강력한 안전장치가 됩니다.


엠마뉘엘 카레르가 “적”에서 고백했듯,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는 ‘타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일일지’ 끊임없이 상상해보려고 애쓰는 것뿐입니다. 비록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할 지라도, 상대의 맥락 곁에서 서성거리는 ‘서툰 정성’이 닿기를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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