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창]을 읽고
유럽에서 한 달을 머물면서 새삼스레 좋아진 것은 유럽의 풍경이나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빵이었죠. 한국에서는 빵보다 밥과 면을 좋아했었는데, 유럽에서 빵과 신선한 올리브오일을 곁들여 먹다보니 어느새 저도 담백하고 짭짤한 빵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사워도우라는 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천연발효종 ‘르방’을 만든 사워도우를 직접 구워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이르렀죠. 그래서 일단 르방을 키우는데, 영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먹이를 주면 일주일만에 쓸만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르방은 두 달째 시원찮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부풀지 않거나 심지어 묽어지기 일쑤였거든요. 책이나 유튜브, 챗지피티에 질문을 해도 이렇다 할 대답이 안 나와서 답답할 따름이었죠.
마치 이 책처럼요. 구병모 작가의 『절창』을 읽는 내내 흐릿한 안개를 헤쳐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서평은 정리하기가 유독 힘들더라고요.
작중에서는 셰익스피어 문학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서사 또한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 인물들이 잘못된 선택과 판단을 거듭하며 상황을 망가뜨리다가,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되어서야 뒤늦게 깨닫는 구조 말입니다. 화자로 등장하는 독서 선생님조차 한 명의 관객처럼 ‘오언’과 ‘아가씨’의 비극을 관람할 뿐이죠.
‘오언'은 모든 걸 소유하려고 애씁니다. 작중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은 그가 이 관계의 독점적 주체임을 보여주죠. 그는 아가씨를 두고 ‘그애는 나의 질문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오언은 또 그녀에게 단 한 가지만 요구합니다. 바로 ‘자신을 읽어달라’는 것입니다. 오언에게 그녀는 ‘자신을 온전히 바라봐주길 원하는 대상’이었던 셈입니다.
‘아가씨’는 상처를 통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작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립된 독자’이지요. 심지어 아가씨가 의지했던 사람들도 모두 본인의 목적을 위해서 아가씨에게 접근했을 뿐, 누구도 그녀라는 책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한쪽에서는 통제를 하며 이해를 강요하고, 다른 한쪽은 상대의 상처만 보느라 실체를 외면하는 또 하나의 비극을 쓰게 됩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단, ‘상처’라는 자극적인 페이지만 탐독한 탓이지요. 서로에 대한 마음을 마지막에서야 확인하는 것까지 비극 그 자체입니다.
이들은 왜 비극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상대의 마음을 읽는 기이한 능력까지 가졌는데, 왜 파국을 막지 못했을까요. ‘타인이라는 텍스트’는 그저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요?
아가씨는 철저한 독서가입니다. 외부와 단절된 저택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은 바로 책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가씨의 능력은 책을 읽는 행위 그 자체를 닮았습니다. 타인(책)을 만지기 전에는 알 수 없고, 베인 상처를 만져야(책을 펼쳐야) 비로소 읽을 수 있죠. 그 순간에 떠오르는 기억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그 책의 ‘해당 페이지’만 읽을 수 있다는 한계와 같습니다. 아가씨 외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각기 다른 ‘책’이라 생각하고 읽어보면, 아가씨의 행동들이 새롭게 읽혀집니다.
문제는 아가씨가 읽어내는 것이 그 사람의 전 생애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화장실이 급한 사람의 상처를 읽었다면, 어떤 진심을 마주하게 될까요? 주거래은행 계좌비밀번호나 거창한 인생관이 아니라, ‘빨리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찰나의 절박함뿐일겁니다. 우리가 책을 무작위로 펼쳐 읽을 때 앞뒤 맥락을 놓치면 오독하기 마련이듯, 타인 또한 어느 한 조각의 편린으로 판단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습니다. 설령 그 찰나를 제대로 읽었다 한들, 그것을 온전하게 표현하고 소통할 능력이 없다면 결국 고립으로 끝나고 맙니다. 오언과 아가씨처럼 말이지요.
아가씨의 능력이 발휘될 때 상대방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그 이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아가씨도 안전하다고 볼 수 있죠. 타인을 직접 읽어내는 일이 이토록 어렵고 위험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독서’라는 감정적 사치가 등장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직접 대면하는 일은 아가씨처럼 소음에 시달리거나, 오언처럼 뒤틀린 집착에 빠지게 될 위험이 큽니다. 현생을 사는 우리에게 쏟아진 감정을 씻어낼 세면대조차 마땅치 않기에, 흔히 ‘감정쓰레기통’이라 불리는 상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말죠. 자칫하면 그 감정을 마주하는 사람마저도 그 감정 속으로 휘말리게 됩니다.
‘책’이라는 필터는 그 날카로운 상황을 활자로 정제하여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활자라는 안전한 지붕 아래서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곁에서 함께 앓아보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걷는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돈도 안되고 효율도 떨어지는 이 무의미해보이는 행위가, 역설적이게도 무너지는 나를 버티게 해주는 궁륭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다. 상처를 원경으로 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화자의 이 말은 꽤나 의미심장하게 들리면서도 한편으론 아쉽기도 합니다. 르방을 키우며 발효와 부패는 한 끗 차이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르방(누룩)은 방치하면 부패하고, 머무르면 발효됩니다. 상처가 사랑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익어갈 때까지 묵묵히 온도와 조건을 맞춰주는 ‘머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도 르방을 키웁니다.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비극보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희극을 좋아하거든요. 조급해하지않고 묵묵히 머무르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