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읽고
이 책은 200페이지 남짓이지만, 5년 전에 처음 펼쳤을 때는 절반도 넘기지 못한 채 포기했던 책입니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삼키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게는 늘 마음 한구석에 남겨둔 숙제 같은 책이었습니다.
당시 이 책을 꺼내 들었던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을 준비하던, 30대 직장인으로서 인생의 큰 변곡점을 지나던 시기였죠. 누가 추천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이 책은 끝까지 읽지 못했음에도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이직이라는 결과를 만들었다기보다, 그 불안한 과정 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한 중심을 만들어줬다고나 할까요. 신기하게도 주변에서 건네준 조언들이 이 책의 내용과 맞닿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저는 다시 이 책을 꺼냈습니다. 왜 다시 이 책이 생각났을까요. 아마 제목처럼, 제 안에 고인 깊은 무기력을 자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인생의 고비가 올 때마다 강렬한 감정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그 자리에 어김없이 무기력이 찾아옵니다. 제게 무기력은 ‘아무것도 못 하겠다’보다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에 가깝습니다. 나라는 기계가 어딘가 고장 나서 삐걱대는 듯한 느낌처럼 말이죠. 평소 삶이 무탈하게 굴러갈 때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이 이질감이, 결핍과 상실의 순간에 비로소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무기력을 느끼는 현대인을 어설프게 위로하거나, 누구나 다 그렇다며 가볍게 넘기지 않습니다. 대신 왜 우리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며 사는지, 왜 스스로를 도구로 취급하며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지를 냉철하게 파고듭니다.
결국 저는 저를 수리하기 위해 이 책을 펼쳤지만, 프롬은 제게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습니다. 너는 고쳐 써야 할 ‘기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당연한 소리입니다. 전 기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 자신을 마치 기계처럼, 혹은 도구처럼 쓰고 있었습니다. 효율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말이죠.
단적인 예로 저는 통화가 불편합니다. 전화공포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에게 내 의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게 늘 버겁습니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어딘가에 문의 전화를 하는 일조차 제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요령이 생겼습니다. 바로 나에게 ‘통화 잘 하는 사람’이라는 페르소나를 씌우는 것이었죠. 마치 게임 캐릭터를 조종하듯 제3자의 눈으로 나에게 명령을 내리면, 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숙련된 메소드 연기를 펼칩니다. 그렇게 상황을 모면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간혹 이 장치는 오작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럴 때면 그동안 미뤄두었던 불안이 마치 빌린 빚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것이 제가 이따금 마주하는 무기력의 일부였습니다.
차라리 전화는 메시지로 대체할 수 있으니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저는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에 휘둘리는 건 ‘비효율적’이고 ‘어른답지 못한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쁨의 순간조차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고, 감정을 향유하기보다 구조화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습니다. 나를 시스템의 일부로 통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전화를 잘 하는 나’, ‘침착하고 감정적이지 않은 나’는 사실 제가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연기였습니다. 그래야만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당당한 ‘1인분’이 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기능적인 유능함’이 멈춰 서는 순간, 저는 더없이 무기력해졌습니다. 이직을 준비하며 ‘직장인으로서의 나’가 소멸하는 기분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죠.
결국 저는 저를 사회라는 시장에 내놓기 좋은, 가장 매끄러운 ‘상품’으로 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겪는 직장 문제나 관계의 상실인데도, 왜 유독 이렇게 깊은 무기력에 빠지는 걸까요. 에리히 프롬은 ‘익명의 권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암묵적인 ’사회적 표준‘을 따라가지 못할 때, 혹은 ‘타인이 바라는 나’의 모습으로 살지 못할 때 인간은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이죠.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소위 말하는 사회적 표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나답게 살기 위해 나름의 발버둥을 치며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다가 깨달았습니다. 저를 옥죄고 있는 것은 이름 모를 대중이나 사회의 권위가 아니라, 바로 ‘20대 초반의 나의 권위’였다는 사실을요.
10대와 20대 시절, 제가 그렸던 30대의 모습은 참으로 당당했습니다. 번듯한 직장에서 부족함 없는 자산을 누리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었죠. 하지만 30대 중반의 현실은 그때의 설계와는 다소 괴리가 있습니다. 그동안의 노력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의 내가 세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예기치 않은 삶의 파도가 덮칠 때마다 저는 자각하곤 합니다. ‘내가 꿈꿨던 모습에서 또 멀어졌구나’라는 서늘한 현실을 말이죠.
물론 그 20대의 간절했던 바람 또한, ‘사회적 표준’에 기반한 ‘남이 바라는 나’였을 겁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당시에는 그런 삶이 평범하고 당연한 정답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지금에 와서야 가치관이 달라졌을지 몰라도, 과거의 내가 발행해버린 ‘미래의 희망’이라는 어음은 이제 자유를 방해하는 질긴 덫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 덫 안에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오히려 희망의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나답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신호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뜻이며, 어떻게든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지독하게 ‘느린’ 글쓰기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책을 멀지도, 그렇다고 아주 가깝지도 않게 두고 살았습니다. 독서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건 불과 2년 전부터였죠. 하지만 그때는 그저 1년 동안 몇 권의 책을 해치우겠다는 ‘성과’에만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이따금 올리는 블로그 서평 역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잘 포장된 결과물이었을 뿐, 지금과 같은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글을 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금세 포기하고 말았죠.
제 생각을 글로 정제하는 지금의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지난합니다. 5시간이면 읽을 책을 10시간 넘게 되새김질하며 정리하고 있으니까요. 예전의 저라면 이를 두고, ‘가성비가 떨어진다’거나 ‘비효율적이다’라며 진작에 그만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되도록 빨리 많은 글을 쓰기 위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갉아먹었을 겁니다. 사회에 내보이기 좋은 나를 연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토록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안 할 이유가 없어서‘. 이 글쓰기가 결국 무기력한 현실이 드라마틱하게 해결되리라는 요행 섞인 기대는 없습니다. 그저 이 시간을 온전히 ‘나를 향유하기 위한 시간’으로 가져가려 합니다. 거창한 동기나 외부의 구원을 바라라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호휘으로 문장을 써 내려가는 이 정직한 과정을 통해 나를 도구로 삼는 습관을 버리고 싶었습니다.
책의 끝에서 프롬은 뜬금없이 성경 속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라와 가족을 떠나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가나안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타인이 기대하는 삶, 안전하지만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 오직 믿음 하나로 나아간 것이죠.
이전까지 저는 아브라함이 본토를 떠나는 행위를 그저 새로운 직장이나 환경에 적응하는 ‘현실적인 도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저의 ‘가족의 땅’은 사회적 표준이나 과거의 약속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제가 발을 내디뎌야 할 가나안은 눈부신 성공을 보장하는 땅이 아니라, ‘자유함’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기준과 과거의 저의 기대로부터 벗어나는 자유 말입니다.
물론 여전히 현실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한숨부터 나옵니다. 이 글을 쓰며, 저의 현실을 직면할 때마다 마음이 몇 번이고 쿵 하고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더는 이 감정이 찾아올 때 무덤덤해지려고 애쓰거나 외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대단한 용기가 생겼다거나 장밋빛 희망을 품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저 1인분을 해내기 위해 이런저런 페르소나를 씌우는 ‘괜찮은 가짜’로 살기보다는,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괴로워하는 진짜’로 남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