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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Dec 23. 2021

생각은 많은데 생각이 느려서 글을 씁니다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아니, 말을 잘 못한다는 표현이 과분할 정도로 말을 못 하고 안 한다. 만약 누군가 나를 어떤 모임에서 처음 봤다면 저 사람은 과연 신체적으로 발성이 가능한 사람인지 심각한 의문을 품을 정도로 말이다.


내가 말을 잘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생각이 느려서다. 누군가 말을 걸면 한참 후에나 할 말이 생각이 난다. 학창 시절에는 교수님의 질문에 항상 누군가 나보다 먼저 대답을 생각해 냈다. 나는 그저 '아, 저게 답이었군'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주 가끔 아무도 먼저 내뱉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대답할 타이밍이 한참이나 지나버린 후였다.


그렇게 생각이 느린 나는 질문을 듣자마자 대답을 해내는 학우를 볼 때마다 항상 깊은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됐다. 대게 모든 사람이 나보다는 빨리 생각을 하고 대답할 줄 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빠른 게 아니라 내가 느리다는 걸.


생각이 느리다 보니 나는 보통 사람들의 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는다면 일행보다 내가 너무 뒤처질 때 "잠깐만요, 같이 가요." 하며 앞선 사람을 멈춰 세울 테지만 대화에선 그럴 수가 없다. 만약 단 둘이 하는 대화라면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해 미안하다며 다시 말해달라고 양해를 구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선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선 보통 듣는 입장이다. 혼자 들은 것을 생각하며 앉아 있곤 한다. 내가 항상 말없이 듣고만 있으니 사람들은 나를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기도 하는데, 그럴 땐 사실 좀 죄송하다. 나는 내 앞의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2분 전에 뱉은 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가 많다.


가끔 이미 생각해 둔 주제의 대화가 오고 갈 땐 이때다 하며 재빨리 내 생각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내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면 낭패다. 나에겐 다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이렇게 무엇이든 생각할 시간이 오래 필요한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하다. 물론 글도 쓸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니 간단한 업무 이메일을 쓰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업무 이메일처럼 데드라인이 있는 글이 아니라면 내 마음대로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져도 돼서 좋다. 내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천천히 몇 번이든 고쳐 쓰면 된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글은 내가 성급히 공개해 버리지만 않는다면 몇 번이고 다듬어 완성도를 높여 갈 수 있다.


그런데 글을 쓰는 것이 좋아져 버리고 나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겨 버렸다. 생각을 전하는 것을 글에만 의존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모든 생각을 글로만 표현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술술 잘 쓰는 것도 아니어서 생각을 표현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걸리다 보니 생각을 표현할 다른 창구가 없는 내 머릿속엔 생각이 쌓여만 간다. 쌓이니 정체되고 내 머릿속은 꽉 막힌 고속도로처럼 점점 더 느려진다.




내가 육성으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6년 된 내 연인이다. 하지만 나를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해주는 이 사람과 대화 중에도 가끔 생각이 느려져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 연인과의 대화에서 생각이 많아지고 느려질 땐 나는 내 연인의 말을 가만히 듣는다. 그리고 연인의 말이 다 듣고 난 뒤 꽤나 참을성이 많은 내 연인조차 답답함이 슬슬 차오를 때쯤 나는 이런 황당한 말을 뱉곤 한다. "내가 지금 대답을 생각 중인데 내 생각을 정리해서 브런치에 발행해 드리면 안 될까요?" 이러니 그녀는 화가 안 치밀어 오를 수가 없다.




가끔 좋은 글을 읽고 작가가 궁금해져서 유튜브에서 찾아볼 때가 있다. 그런데 찾아보고 나면 '아, 이분의 말씀은 말보다 글로 듣는 게 나는 더 좋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땐 어쩌면 이 분도 나와 같이 생각이 느린 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 자신을 토닥이곤 한다.


말보단 글을 잘 썼던 사람 중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바울 (영어로 폴 Paul)이라는 사람이 있다. 약 2,000년 전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 새번역 성경]


난 2,000년 전에 살았던 폴처럼 말주변이 변변치 못하다. 하지만 그처럼 글만큼은 무게와 힘이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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