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챙 May 30. 2021

책을 못 읽는 내가 에세이를 읽는 이유

어릴 적 초등학교 새 학기가 되면 새 교과서를 받는 게 참 좋았다. 그 책으로 공부할 생각에 들떴던 건 아니고, 깨끗하고 빳빳한 새 책 느낌이 좋았다. 돌아보면 그 기분 좋은 교과서들은 두께도 참 적당했다. 1학기와 2학기로 나뉘어 있는, 한 학기에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충분히 다 끝낼 수 있을 만한 분량의 책.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이민을 왔을 때, 나는 매 학기 누리는 새 교과서의 설렘을 박탈당했다. 교과서를 받는 경험만 놓고 보자면 대도시 지상 복합 아파트에 살던 부잣집 도련님이 강원도 철원의 살 에이는 겨울, 실외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기분이었달까.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적은 없지만 강원도 철원에서 실외 재래식 화장실을 써봤던 경험은 있다)


미국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는 나에게 끔찍했다. 족히 10년은 돌려본 듯한 낡은 양장본의 책. 딱 봐도 절대 1년 안에는 다 배울 수 없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두께. 그리고 분명 그 교과서를 쓴 사람은 그 두꺼운 책 안에 그 많은 내용을 목차에 나온 순서대로 넣은 이유가 있었을 텐데 선생님은 본인의 커리큘럼에 맞춰 내용 여기저기를 건너뛰며 수업을 진행했다. 챕터를 건너뛸 때는 내가 도대체 뭘 놓친 걸까 찝찝했고 지금 읽는 챕터에서 건너뛴 챕터를 언급할 때면 경악했다.


그런 미국 공립학교의 교과서 선택과 이용 실태에 대한 불만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 한 친구가 선생님께 이렇게 말했다. "티쳐, 이 책 내용이 정말 재밌네요. 혹시 미래에 제가 사고를 쳐서 종신형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이 책을 저에게 보내주시겠어요? 꼭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해보고 싶거든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책날개와 목차, 서문, 그리고 판권 페이지의 한 글자까지 빼놓지 않고 읽어야 마음이 편했다. 학업이나 업무 때문에 꼭 정해진 시간 안에 읽어내야 하는, 그래서 꼼꼼히 읽지 못하는 책은 내 마음을 참 불편하게 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고는 미안하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처럼...


책을 천천히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렇게 읽다 보면 본 내용에 접근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걸리면 지루해지고 (목차가 재미없는 책을 읽을 때는 정말 큰 고비다) 지루해지면 그냥 나중에 읽자며 책을 내려놓는다. 그런데 나는 기억력이 나빠서 끝내지 못한 책을 며칠 후에 집어 들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가뜩이나 읽는 속도가 느린데 책을 그렇게 읽다 보니 내가 끝낸 장편 소설은 그리 많지 않다.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지만 어린아이도 재밌게 술술 읽는다는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도 끝까지 못 읽어 봤다. 한 2권에서 포기한 것도 아니라 첫 권도 못 끝냈다.


그렇게 책도 잘 못 읽으면서 어쩌다 읽는 행위는 좋아하게 됐는지, 나는 글자가 있는 물건만 보면 집어 들고 뭐라고 쓰여있나 읽고 다녔다. 특히 그런 행위는 읽을거리가 없어진 신병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절정에 달했는데, 두루마리 휴지 포장지에 적힌 글자, 청소용품 설명서나 군복의 상표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따위를 읽고 다녔다. (참고로 미군의 청소용품은 버지니아 주에서 시각장애인을 고용하는 회사가 만든다.)




좋아하는 "읽기"와 내가 읽어내지 못하는 책들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읽는 행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전공으로 영문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영문학에서 접한 순수 문학은 끔찍했다. 학우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는 시(poem)들은 너무 짧아 항상 내가 그들의 감탄에 공감할 수 있기 전에 끝나 버렸고, 두께도 끔찍한 고전들은 그 단어나 내용마저도 경악스럽게 어려웠다. 나는 문학의 길에서 막다른 곳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렇게 대학교 2학년. 듣기 싫은 전공 수업 중에서 나는 또 어떤 수업을 신청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수업이 눈에 들어왔다. The Literary Essay. 직역하자면 "문학적 에세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 구미가 당겼던 건 아니지만, 다른 수업들은 전혀 주지 못했던 약간의 끌림을 주었기에 수강 신청을 했다. 그리고 그 수업과 그 수업에서 접한 에세이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꼼꼼히 읽어낼 수 있는 길이의 글. 그리고 내가 "고전"을 떠올릴 때 기대하는 시대가 지나도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이야기. 내가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왠지 "문학" 안에 있을 것 같은 묵직하면서 잔잔한 깊이. 이것이 문학적 에세이라면, 이 에세이들이 담고 있는 것이 문학적인 것이라면, 나는 문학이 뭔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에세이에 빠지게 해 준 문학적 에세이는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작품이었다. 몇 페이지 만으로 자신이 전하려는 내용과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스스로 서 있는 작품. 작가의 배경을 알지 못하거나 특정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누구나 대게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요소들을 사용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시킬 수 있는 독립된 작품.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알려주는 에세이. 그렇게 잔잔하지만 명확한, 치장하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에세이가 좋았다.  나는 그렇게 에세이에 빠졌고 비로소 문학에 입문했다.




나처럼 책을 읽는 것이 어려워 에세이라는 약을 처방받아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잘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문학적 에세이를 한 편쯤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에세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딱 맞는 처방약처럼 잘 듣기도 하지만 비타민 씨처럼 누구에게나 필요한 영양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혹 문학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시는 분들께는 일 년에 한 번쯤, 언젠가 잠들지 못하는 밤이 오는 날에 짧은 에세이 한 편을 권하고 싶다. 내가 에세이를 알고 나니 문학이란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모든 우리네 삶에는 여러 가지 일어나고, 그 일들은 우리 안에 어떤 생각과 감정들을 일으키고, 문학이란 단지 그런 것들을 언어로 표현한 것뿐이니까. 그리고 에세이는 쉽게, 잘난 체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에 문학이란 작은 쉼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