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ing down the rabbit hole"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토끼 굴로 내려가다"라는 이 표현은, 무슨 말이나 일을 하다가 갑자기 주제나 목적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가버릴 때를 일컫는 말이다.
나는 처음에 이 표현을 들었을 때, 진짜 토끼가 사는 굴은 너무 복잡해서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나 보다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표현은 1865년에 발표된 루이스 캐럴의 어린이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날 언덕에 앉아 있던 소설의 주인공 앨리스는 이상한 토끼 한 마리를 보게 된다. 토끼는 입고 있던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보고선 "이런! 이런! 너무 늦겠는걸!" 하고 중얼거리며 뛰어갔고, 신기한 토끼를 따라가던 앨리스는 토끼 굴, "이상한 나라"로 내려가 버린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는 장면이 담긴 첫 장(chapter)의 제목이 바로 "Down the Rabbit Hole, 토끼 굴로 내려가다"이다.
나도 가끔 토끼 굴로 내려갈 때가 있다. 유튜브를 잠깐만 봐야지 하고 쇼츠를 보다가 유튜브 안의 이상한 세계로 들어가 버리거나, 이번 달에는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였나 한 번 둘러볼까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장바구니에 한가득 담긴 책을 결제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토끼를 잘못 따라가면 이상한 유튜브의 세계에 빠져버릴 수도,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에서 신기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 모든 토끼가 주인공을 꼭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는 건 아니다.
2014년 겨울, 나는 미국 시애틀에서 참 예쁜 토끼 한 마리를 봤다. 이 토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온 토끼가 입고 있던 조끼가 아닌 신입 여사원 같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계속 바라보다 보니 괜히 말 한 번 걸어볼 구실을 만들고, 밥 한 번 사줘야 할 고마운 일을 당해버리고, 말이 끊기면 집에 가버릴까 평소에는 속 터지게 말 없는 내가 밤새도록 조잘거렸다. 그렇게 토끼를 쫓아가다 연애를 했고 결국엔 토끼의 남편이 되었다. 그리고 예쁜 토끼에게 7년 넘게 넋이 나가 있다 보니, 이제 이런 오글거리는 글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게 됐다.
어쩌다 보니 예쁜 토끼를 따라 여기까지 왔지만, 토끼와 내 이야기는 앨리스가 잠에서 깨자 사라져 버린 꿈처럼 끝나버리면 안 된다. 그러니 내 토끼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지 않게, 지금까지 나를 이끌었던 토끼 손을 꼭 잡고 이상한 나라가 아닌 참 좋은 나라로 데려가야겠다. 그리고 당신이 만약 토끼와 내 이야기를 계속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앞으로 닥칠 오글거림은 오롯이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