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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Jan 01. 2024

2023년 마지막 날, 베갯잇을 다렸다



2023년 12월 31일. 한해 묵은 때를 벗겨내듯 방청소를 하고 이불보와 베갯잇을 빨았다. 이불에 이불보를 씌우고 베개에 베갯잇을 씌우기 전 문득, 베갯잇 한 번 다려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올해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니 한해 마지막날에 꽤나 어울리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다리미대를 펼치고 스팀다리미에 물을 채워 넣었다. 다리미가 충분히 달궈졌다는 빨간불이 들어오고 베갯잇을 모서리부터 꼼꼼하게 빳빳하게 다리기 시작했다. 주름진 베갯잇이 빳빳하게 펴지는 걸 보니 마음이 후련했다. 베개에 빳빳한 베갯잇을 씌우고 비누 냄새가 나는 깨끗한 이불 위에 세팅하니 마치 내 방이 아직 아무도 건들지 않은 호텔방 같았다. 물론 내일 아침이면 다시 주름질 베갯잇이지만 오늘 밤만큼은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터였다.






몇 년 전 생애 첫 집을 장만했다. 융자를 얻으며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여행 다니는 비용을 줄이고 내 집을 호텔방처럼 깨끗하게 하고 살면 이건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감사하고 설렜던 내 집도, 익숙하고 편해지니 호텔처럼 지내기는커녕 이불보를 빠는 것도, 때론 자고 일어나서 이불 정리를 하는 것도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곳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전체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이다.


가만히 놔두면 확산되는 무질서는 내 방도 그렇다. 주름진 베갯잇은 정리되지 않는 이불로, 정리되지 않은 이불은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는 빨래로 확산된다.






쉽게 주름지는 내 순면 베갯잇처럼 잘 주름지고 구겨지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내 결심과 다짐이다.


나는 뭐든 쉽게 결심하고, 쉽게 시작한다. 가끔 실행력이 좋다며 곱게 봐주는 사람도 있지만, 대게 성급한 실행은 끈기 없는 도전으로 끝날 때가 많다. 내 귀는 얇고, 마음은 금방 들뜨고, 들뜬 가슴은 쉬이 가라앉는다. 여러 꿈들이 쉽게 좌절되어 사라진다.


2023년 한 해가 갔다. 지난해에도 내 삶에 떠올랐다 사라진 꿈들이 있었다. 어떤 꿈은 쉽게 잊혔고, 어떤 꿈은 아쉽지만 내 것이 아니었단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여러 꿈을 꾸며 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이루어야 하는 평생의 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시간이 지나도 자꾸 꾸게 되는 꿈, 잊히지가 않는 꿈,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쉬운 꿈, 하지만 반드시 이루고 싶고 이룰 꿈.


이제 필요한 것은 용기, 그리고 나의 용기가 사그라들지 않도록 도와줄 동기일 테다.






2024년 새해가 왔다.


올 한 해, 머리만 갖다 대도 쉬이 구겨지는 내 베갯잇을 매일 빳빳하게 다릴 수는 없겠지만, 매일 조금씩 다가가야 할 내 꿈을 위한 동기와 용기는 매일 빳빳하게 다려줘야겠다.


올해는 매일 빳빳하고 깨끗한 용기라는 베갯잇 위에서 마음껏 꿈꿀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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