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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Jul 02. 2023

맥도날드 애플파이 같은 일

주중 아침에는 출근 전 텀블러에 캡슐 커피를 내린다. 이 텀블러를 쓴 지는 몇 년이나 되었을까. 텀블러 바닥 한 구석은 찌그러져 에펠탑처럼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고, 수많은 설거지를 견디지 못한 코팅은 여기저기 벗겨져 살짝 광이 나는 스테인리스 속살을 내비친다. 하나 장만하면 몇 년은 쓸 텀블러를 새로 하나 살 수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커피를 1시간은 따뜻하게 지켜주는 내 오래된 텀블러가 익숙하고 편하다.




미국 어느 유명 자기계발 유튜버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침 알람을 여러 개 맞추지 말라고. 단 하나의 알람이 울리면 고민하지 말고 바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라고. 하지만 그런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사람이 자신에게 그렇게 칼 같으면 너무 정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게 말처럼 쉬웠다면 수많은 자기계발 영상들의 조회수가 그렇게나 높지는 않을 거다.


한국의 어느 자기계발 유튜버는 이런 말을 했다. 시간을 쪼개서 쓰라고.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고 하루를 효율적으로 꽉꽉 채워 살라고. 나는 역시나 한국인 정서인가 보다. 이 말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나도 아침 시간을 꽉꽉 채운다. 두 번째 알람소리에 벌떡 일어나 양치를 하고, 물 한잔을 마시고, 아침 시간을 효율적으로 꽉꽉 채워 1분도 낭비하지 않는다. 그래야 1분이라도 더 잘 수 있으니까.




약 3,000년 전에 태어난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혜를 담은 3권의 책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중 한 권에는 이런 말이 있다:


게으른 사람아, 언제까지 누워 있으려느냐? 언제 잠에서 깨어 일어나려느냐?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하면, 네게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 [1]


3,000년 전에도 나처럼 "조금만 더 자야지"하며 첫 번째 알람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다행히 나는 아직 가난과 빈곤이 들이닥칠 만큼의 알람을 끄지는 않았다.




얼마 전 두 번째 알람을 듣자마자 바로 세 번째 알람을 맞추고 다시 잠에 들었다. 정확히 10분 후, 세 번째 알람을 듣고 일어나 양치를 하고 물을 마시고 하루를 시작했다. 지난밤 꺼내둔 검은색 양말을 신고,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평소와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역시 사람이 군대를 갔다 오면 평소보다 10분을 더 자도 이렇게나 효율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평소보다 10분을 더 자서 그런지 10분어치 더 개운한 기분으로 차를 몰고 도로에 들어섰다. 평소처럼 사거리 신호등에 걸려 커피를 한 모금하려는 순간, 번뜩 생각이 났다. 커피를 안 챙겨 왔다. 역시 군필도 시간을 거스를 순 없다. 10분을 더 자면 10분 동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왜 비몽사몽일 때는 이미 최대한 빠듯하게 계획한 아침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왜 10분을 더 자도 조금 더 서두르면 평소와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는 걸까. 도대체 왜.




모닝커피를 겨우 10분의 잠과 맞바꿔버리다니. 이건 비싸도 너무 비싸다. 그렇다면 이 부당거래를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은? 사거리 빨간불이 초록으로 바뀌기 전 재빨리 두뇌회전을 시작한다. 가는 길선상에 있는 드라이브스루 커피 가게는? 맥도날드.


맥도날드는 커피도 싸고 맥모닝도 먹을 수 있다. 나쁘지 않다. 재빨리 맥도날드 앱을 켜고 라지 커피 한 잔과 맥모닝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결제를 하려는데 디저트를 추가하겠냐는 알림이 뜬다. "애플파이 한 개에 2달러 29센트". 까짓 거 오늘은 애플파이도 먹자.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는 찰나에 결제를 마무리한다. 순조롭다. 짭조름한 맥모닝을 먹은 후,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달달한 애플파이를 커피와 함께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다. 메뉴 선택까지 완벽하다.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에 들려 직원분께 커피 한 잔과 종이백을 건네받은 후 좋은 하루를 보내라며 밝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한다: "해브 어 나이스데이".


맥도날드를 빠져나와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 마신다. 향이 나쁘지 않다. 커피를 조금씩 홀짝이며 아직은 한산한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이제 커피를 컵홀더에 내려두고 종이백에 손을 넣는다. 뭔가 허전하다. 맥모닝 옆에 있어야 할 애플파이 상자가 손끝에 느껴지지 않는다. 종이백 안에서 아무리 손을 휘저어 봐도 맥모닝과 냅킨만 만져질 뿐이다. 아까 직원에게 웃어주지 말 걸 그랬다.


아침 출근길에 애플파이를 다시 받으러 돌아갈 수는 없다. 퇴근길에도 2달러 29센트짜리 애플파이 하나 때문에 맥도날드에 다시 돌아갈 마음은 없다. 돌아간다면 아마 돌아가는 길에 쓴 시간이 아까워 더 짜증이 나고, 그러면 왠지 직원에게 진상을 부릴 것만 같다. 애플파이 하나 때문에 진상을 부리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래, 그냥 비싼 커피 한 잔 마셨다고 생각하자.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 잔 마셨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나마 맥모닝과 커피는 맛있었다.




가끔 받지 못한 맥도날드 애플파이 같은 일들이 일어날 때가 있다.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 말이다. 출근길 도로에 차를 끌고 나왔다면 분명 운전면허 시험을 통과한 사람일 텐데 깜빡이를 안 켜고 갑자기 끼어드는 운전자라던지, 내가 베푼 호의에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라던지, 자기가 부딪혀놓고 사과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던지, 내가 돈 내고 먹는 식당에서 받는 불친절한 서비스 같은 일들 말이다. 그럴 땐 그냥 이건 2달러 29센트짜리 애플파이 같은 것뿐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건 어떨까. 짜증 나고 억울하고 아쉽지만, 따지고 들기엔 내 시간과 마음씀이 아까우니까 말이다. 그것을 받았다면 인생이 아주 조금은 더 달콤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에겐 고픈 배와 모자란 카페인을 채워줄 맥모닝과 커피가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나도 다른 이들에게 미처 챙겨주지 못한 애플파이 같은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때론 사소해 보이지만 지나친 시간, 노력, 그리고 감정을 쏟아부으면서까지 보상받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나는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했는데 사회가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할 때, 그냥 솔직하게 내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한 마디 해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을 자존심 때문에 크게 키우는 남편의 못남 같은 것 말이다. 애플파이 정도는 넘어갈 수 있지만 맥모닝과 커피를 잊는다면 그건 예삿일이 아니니까.




이번 주 일요일 밤엔 알람을 하나만 맞추고 자야겠다.



[1] 잠언 6:9-11, 새번역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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