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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Jan 31. 2024

부끄럽지만 내일은 덜 부끄러우려고 오늘도 글을 씁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 있으면 부끄러움을 모른다.

난 춤을 못 춘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땐 춤을 춘다.

아무도 안 보면 괜찮으니까.


사람은 친한 사람과 있을 때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나는 아내 앞에선 춤을 춘다.

우리끼리는 괜찮으니까.

하지만 난 여전히 춤을 못 춘다.


누군가 내 춤을 본다면 아마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할 거다.

저 사람 왜 저래.






기독교 용어 중에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이 있다. 라틴어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인데, 코람은 '면전에서/앞에서(in the presence of)', 데오는 하나님(God)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살라는 뜻이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죄를 지을 수도, 부끄러운 짓을 할 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누가 안 보면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한다.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을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말이 있다.


"내가 다 봤어."


내가 뭘 봤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무도 안 본다고 생각할 땐 괜찮았는데 누가 나의 모습을 봤다면 부끄러울 일이 참 많다.


만약 모두가 항상 누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산다면 대한민국은 참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거다. (물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세상엔 하지 말아야 할 부끄러운 일들이 있지만, 해야 하는데 부끄러워서 하지 못하는 일들도 있다. 아니, 하긴 하는데 아직은 부끄러워 남들에게 공개 안 하는 것들이 있다. 내게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건 글쓰기다.


브런치스토리에서 새 글을 쓰면 쓰기 시작한 순서대로 글에 번호가 매겨진다. 지금 이 글의 번호는 471번이다. 하지만 발행되어 남들에게 공개된 내 글은 이 글을 포함해 107개다. 발행했다가 다시 비공개로 전환한 글도 50개가 넘는다.


내 글을 남에게 보이는 건 항상 어렵다. 조금 더 다듬어야 할 거 같고, 다듬다 보면 이런 글은 공개 안 하는 게 낫겠다 싶다. 이런 글을 쓰느라 보내버린 시간이 아깝다.


하지만 부끄러운 글을 일단 공개하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갑자기 막혔던 코가 뻥 뚫리면서 공개하기 전엔 안 보였던 꼬인 문장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적절하지 않은 단어, 잘못된 띄어쓰기,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 문장들. 남의 시선은 이렇게나 효과적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올린 글이라도 '남이 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은 내 글의 잘못된 점을 찾아내게 만든다. 왜 이제야 보이는지 야속하지만 이제라도 보여서 다행이다. 발행 후 다시 읽기와 수정을 반복한다. 반복하며 글이 아주 조금 나아진다.


역시 난 관종인 걸까. 왜 꼭 남들이 봐줘야 제대로 하는 걸까.






짠! 하고 나타나고 싶었다. 재야의 고수. 혜성같이 등장한 천재 작가. 내 글을 사람들이, 출판사가, 그리고 공모전 심사위원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 줄 알았다.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볼 게 없는 거였다.


그래, 어차피 천재가 되기엔 난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다. 그리고 원래 천재는 부러워서 꼴 보기 싫다. 꼴 보기 싫은 천재보단 노력이 가상해 눈물겨운 부지런한 둔재가 되자.






오늘도 글을 썼다. 오늘은 얼마나 조금 나아졌을까. 조금은 나아졌을까. 발행 전에도 후에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내일은 조금 덜 부끄러운 글을 쓸 수 있겠지. 그렇겠지?


평생 춤은 아내 앞에서만 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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