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루기를 잘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땐 매일 밤늦게 숙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밤 다짐했다. 내일은 꼭 집에 오자마자 숙제를 시작하겠다고. 숙제부터 끝내놓고 여유로운 저녁을 보내겠다고. 그 다짐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켜지지 못했고, 그 버릇은 대학교까지 이어졌다.
대학교 과제를 마지막날까지 미루면 밤을 꼬박 지새워도 모자라다. 밤이 늦어지고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자신과의 타협이 시작된다. 이번 과제는 최소 점수만 받아도 괜찮아. 이번 과제는 망해도 이번 학기는 졸업할 수 있어. 그냥 드롭하고 다음에 다시 들을까? 그러다 곧 현타가 찾아온다. 지금까지 대학교에 갖다 바친 돈이 얼만데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이럴 거면 알바나 뛰지 대학에는 뭐 하러 왔나. 다시 정신을 부여잡는다.
늦은 밤 잠은 쏟아지는데 과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을 때, 내가 지금 뭘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단어 개수만 채우자, 리포트 장수만 채우자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친구들은 미리 과제를 끝내고 지금 꿀잠을 자고 있겠지.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럴 때 가장 위로가 되는 건 같은 수업 듣는 친구의 문자 한 개다.
"자냐? 난 오늘 밤샐 것 같다."
친구야, 너도 아직 못 자고 있구나. 나만 망한 게 아니구나. 동병상련. 위로가 된다. 아주 깜깜하던 세상에 갑자기 작은 촛불이 켜졌다.
개버릇은 남 못준다.
고등학교 숙제 미루던 버릇은 대학교 과제 미루는 버릇을 낳고, 대학교에서도 고치지 못한 버릇은 직장인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열심히 일하기를 미루고, 이직을 미루고, 퇴사를 미루고, 하고 싶은 일 시작하기를 미룬다. 독서를 미루고 글쓰기를 미룬다.
20대를 지나 30대가 되고 이제 곧 40인데도 미루기만 한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만 한다. 언젠간 쓸 거라고 생각만 한다. 오늘은 쓸 거라고 생각만 한다. 오늘 잠들기 전까진 반드시 글을 쓰고 말 거라고 생각만 한다.
오늘도 이미 잠은 쏟아지고, 내일 아침 일어나 출근은 해야 하고, 이렇게 뿌연 정신으로 쓴 글은 내일 보면 부끄러울 것이 뻔하고. 아마 오늘 밤을 꼬박 새우고 써도 글은 개판일 텐데 그냥 글자수만 채워서 맞춤법 검사기 돌리고 발행해 버릴까. 그냥 이번 글은 작가의 서랍에 넣어두고 잠이나 잘까.
난 여전히 혼자 글 쓰고 있는 것 같고, 다 써도 낙제 점수일 것 같고, 다들 원하는 꿈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나 홀로 헤매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친구들은 다 애 낳고 잘살고 있어 나도 너처럼 헤매고 있다며 문자올 일도 없다.
괜찮아, 100세 시대인데 나는 아직 반도 안 왔잖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엔 괜찮지가 않다.
밤 깊은 지 오랜데 아직도 글 쓰고 계신가요?
이번 글도 망한 것 같으신가요?
저도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