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챙 Feb 15. 2024

우리 둘 다 목사 아들인데 왜 쟤네 집만 돈이 있어?



친증조할머니 때부터라고 했다. 우리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된 건. 그때 할머니 가족은 북한에 살고 있었고, 꽤나 부자였다고 했다.


증조할머니는 당시 예수를 믿던 여느 사람이 그랬듯 재물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당시 증조할머니에겐 삼대독자 아들이 있었다. 우리 친할아버지다. 친할아버지에겐 아내와 어린 딸이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증조할머니는 당신은 북한에 남으시고 아들 가족을 남한으로 피신 보냈다. 마치 소설 『토지』에서 윤씨 부인이 서희에게 금덩어리를 챙겨주며 피신 보내 듯, 증조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돈을 쥐어주며 남한으로 보냈다.


증조할머니가 딱 거기까지만 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증조할머니는 아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한 마디를 보태셨다: 남한에 가서 살아남거든 목사가 되거라.






1900년대 초, 곱게 자란 부잣집 삼대독자. 고생을 해봤을 리 없다. 남한에 내려온 친할아버지는 고생고생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40대가 되어서야 어머니 말씀대로 목사가 되었다.


가장 직업은 시골 목사인데 자식넷에 아들 셋, 7남매. 그런 집에 돈이 있으래야 있을 수가 없다. 그래도 그런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던 건지, 가난하게 자란 아들 셋도 전부 신학교에 갔다. 가긴 갔다.


첫째 아들은 신학교에 갔다가 새벽기도가 적성에 안 맞아 당구장을 운영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둘째 아들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를 하다가, 목사 사모님이 적성에 안 맞는 아내와 이혼을 하고 더 이상 목사를 할 수가 없었다.


셋째 아들만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쭉 목사를 하고 아들 셋을 낳았는데, 나는 이 셋 중 둘째 아들이다.






우리 아버지는 강원도 시골 교회의 목사였다. 찢어지게 가난하진 않았지만 넉넉하지도 않았다.


우리 가족은 교회에 딸린 사택에 살았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교회 사무실에서 어른들이 짜장면을 먹고 계셨다.


짜장면 냄새에 홀린 나는 집으로 들어가 엄마한테 짜장면을 사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들을 이기지 못한 엄마는 알겠다며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는데, 향한 곳은 중국집이 아니라 동네 슈퍼였다. 엄마는 짜장면 사 먹을 돈이 없어 대신 짜파게티를 사서 끓여주겠다고 했다. 아마 나는 슈퍼에서 또 떼를 썼던 것 같다.


300원만 있어도 감사했고, 500원만 있으면 날아갈 것 같은 어린 시절이었지만, 불행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우리 아빠였다. 돈이 많은 게 더 이상했다.






내가 6학년을 마치던 해 겨울, 부모님은 돌연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정했다. 미국에 부자 고모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미국에 온 지 얼마 후, 아버지가 계시던 시골 교회에서 다시 아버지를 불렀다. 교회를 맡은 목사님이 교회를 떠났다는 거 같았다. 부모님은 상의 후 아버지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가난한 시골 교회에서 미국에 있는 목사님 식구 생활비를 줄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우리에겐 부자 고모가 있었다. 엄마와 우리 삼 형제는 아버지 없이 미국 고모집에 살게 되었다.


어른들에겐 어른들의 사정이 있겠지만, 아버지가 함께 없을 때 아버지의 식구들은 우리 가족에게 그리 상냥하지 않았다.


결국 엄마랑 아들 셋 우리 네 식구는 작은 집을 따로 얻어 독립을 했다. 미국에서 엄마 혼자 싱글 인컴으로 아들 셋을 먹여 살릴 순 없다. 형과 나는 평일에 학교를 마치면 엄마와 함께 빌딩 청소를 하러 갔다. 그리고 주말에는 편의점, 치킨집, 주유소 등에서 알바를 했다.


그렇다고 형이나 나나,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서로 쑥스러워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아버지가 돈은 못 보내줘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형과 나 둘 다 마음속에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편하게 살면서 "고생 안 해본 애들"과는 달리 스스로 자기 밥벌이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 살다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일을 했고, 내 학비는 내가 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다니던 한국 교회에 한국에서 온 목사님 아들이 새로 왔다. 그런데 친구는 옷차림만 봐도 꽤나 사는 아들 같았다. 먼 타국 미국에 와서도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됐고, 비싼 유학생 학비와 생활비를 한국에서 받아 쓴다고 했다.


뭔가 씁쓸했다. 목사 아들도 "고생 안 해본 애"가 될 수 있었던 거다.






나와 두 살 터울인 형과 나와는 달리, 우리 집 늦둥이 막내는 미국에 살면서도 비교적 고생을 안 했다.


막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막내가 엄마에게 치아교정을 시켜달라고 했다. 나 때는 치아교정은 부잣집 애들만 하는 거였는데 막내는 너무 당당히 요구했다. 마치 어릴 적 내가 엄마한테 짜장면을 사달라고 했던 것처럼.


그래도 엄마, 형,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일을 하고 있어서 막내 치아교정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막내가 그렇게 원하던 치아교정을 하고 나서, 나는 막내에게 말했다.


"형 때는 비싸서 치아교정은 생각도 못했는데, 너는 참 좋겠다."


그러자 막내는 아주 의아하다는 듯 내게 말했다.


"그냥 형도 엄마한테 해달라 그러지 그랬어."


고생 안 해본 목사 아들, 우리 집에도 하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삼성 핸드폰이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싼 건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