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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Sep 28. 2022

반짝거리던 선배의 품격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을 먼저 나서서 하는 건 쉽지 않고 그래서 선배의 배려는 참 따뜻했다. Paul 제공

몇주 동안 취재를 이어오던 아이템이 엎어진 바 있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황이 맞지 않아 홀드하게 된 것이었다.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새로온 데스크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쉽지만 흘려보내는 게 맞는 결정일 수 있겠다고 하셨다. 이같은 순간은 마주할 때마다 적잖은 쓰라림을 주곤 한다. 아쉬움과 뒤섞인 것인데 포기를 알아가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당시 바쁜 상황이었어서 잊고 업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저녁에 TV를 보며 여유롭게 쉬는데 데스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유는 감동적이었다. 아까 내 전화를 받았을 때가 편집회의 중이었는데 제대로 이야기를 전해준 것 같지 않아 여유있게 할 말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자신도 평기자로 일하며 갖은 이유로 기사가 엎어질 때 마음이 좋지 않았다며 위로를 건네셨다. 아쉬운 건 당연하다며 내가 처했던 상황은 기자 누구나 겪는다고 계속 상기시켜주셨다. 까마득한 후배를 위해 복잡한 퇴근길에서 굳이 전화를 걸어준 선배의 마음이 수화기 너머로 가득 전해졌다.


지난 몇달 동안 참 힘든 시간을 보냈다. 물론 어떤 직장이 힘들지 않냐고 한다면 딱히 반박하지 못하겠으나 어쨌든 마음이 어려웠다. 구성원들을 존중하지 않고 감정이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휘두르기 바쁜 상사 밑에서 도전, 희망 등의 단어들은 사치였다. 그래도 배운 게 있지 않냐고 한다면 글쎼, 너무 힘들어 팀원 간 불신이 쌓여가기 바빴다. 분명 누구 하나 잘못한 것 없는데 불필요한 오해가 쌓이기 딱 좋은 업무환경이었다. 그냥 하루 빨리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시간 동안 매일밤 자기 전 이런 기도를 했었다.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는 상사를 보내달라고 말이다. 다른 것 필요하지 않고 제발 원하는 일 실컷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도만 반복했다. 덧붙일 수 있다면 존중과 배려 가운데 1개라도 배울 수 있는 선배가 오길 바랬다. 기도의 시간은 늘어가는데 현실은 도무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 목소리를 듣고 계시냐며 불평을 잇따라 늘어놓기도 했다. 뭐 대단히 큰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답답한 상황을 벗고 싶어 간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이후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고 선배들과 함께 염원했던 소원이 이뤄졌다. 새로운 데스크가 왔는데 업무 스타일을 소문으로도 들어보지 못했었다. 딱 한가지, 타협 없이 FM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새 데스크는 놀라울정도로 강직했는데 후배들이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존중과 배려로 채워가셨다. 무엇보다 본인이 솔선수범해 일을 했다. 저녁부터 새벽사이 속보가 뜨면 후배들을 찾지 않고 본인이 기사를 작성했다. 하기 싫은 일을 남한테 떠넘기지 않은 것인데, 팀 선배들과 난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더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냐고.


할머니 장례식 때도 이 선배는 온전한 배려를 보여주셨다. 결재 절차는 일단 놔두고 할머니를 잘 보내드리는 게 먼저라고 하셨다. 이후 내가 처리해야 할 갖가지 서류 작업들을 대신 해주셨다. 주말이라 행정팀의 결재 절차가 미뤄질 것을 염려해 직접 전달 가능한 당직 부서원들에 연락을 취해 발빠른 피드백도 받을 수 있었다. 한 부서의 장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이전 매체들에서 좋은 선배들을 만나며 당연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걸 한 번 경험하니 마음을 쓰는 건 참 어렵고 대단한 움직임을 보여준 선배가 무척 고마웠다.


앞서 언급한 선배와의 전화를 끝고 난 뒤 "기도가 이뤄졌네"란 말을 내뱉었다. 입직을 하게 된 건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답답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이끄셨으니 책임져주세요'란 기도를 해나가며 일을 하는데 이번에도 윗분은 목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주셨다. A를 했으니 B를 얻었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감사였는데 또 한가지의 감사를 적립했음이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꿈을 이룬 게 절대로 내 힘이 아니었다는 걸 다시 깨닫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내어줄 채비를 해봤다. 획일적인 직장생활 가운데 지속해서 갈 수 있는 힘을 순간마다 얻는 건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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