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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Oct 22. 2022

실명으로 중계하는 사람들

채용 사이트를 드나들며 나는 왜 이 직군을 원했을까 불현듯 고민에 빠지곤 한다. Paul 제공

얼마 전 회사에 들어가 야근을 하고 있을 때다. 7시를 넘기니 보도국에 설치된 TV들에서 하나 둘 씩 뉴스가 송출되기 시작했다. 각 부서 보조 데스크들이나 당직은 그 뉴스에 집중하며 우리가 채 다루지 못한 중요한 이슈가 있었나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날 거의 모든 방송 뉴스들의 TOP은 정치권 이슈였다. 기자들은 배경 설명과 분석을 열심히 이어갔는데 함께 삽입된 장면들 대부분은 의원들의 고성과 싸움이 뒤섞인 모습 뿐이었다.


불현듯 대표와 가진 식사 자리가 떠올랐다. 한참 밥을 먹고 있던 대표는 대뜸 "요즘 뉴스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는 말을 했다. 민생은 뒷전이고 이념에 사로 잡혀 싸움만 하는 정치권 상황을 기사로 중계해야 하는 데 따른 답답함이 한숨의 근원이라고 했다. 어쨌든 국내 주요 이슈이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다뤄야 하는 언론의 숙명이 싫다고도 하셨다. 당시 이 말을 들을 땐 큰 의미 없이 하늘 같은 선배에게 당연히 내어드려야 할 끄덕임을 선보였었다. 그런데 보도국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런 말이었군'이란 동의가 저절로 나왔다.


순간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며 써 내려가던 기사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일의 본질이 정말로 뭘까란 심오한 잡념은 둘째치고 나는 현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루를 돌아보니 나도 별 다르지 않았다는 걸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중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문득 문득 들었던 생각이지만 이날도 역시 이름과 이메일을 같이 기재하는 '바이라인'이 중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것 이외에 무엇이 특별할까 싶었다.


현대에 와서 기자는 현상을 중계하는 사람이란 의미가 분명해져가고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방향과 다른 말을 하면 무조건 틀렸다고 규정하며 결이 맞는 소식을 구성하는 유튜버에 열광하는 행태가 그러하다. 본인이 매수한 주식의 분석기사를 작성하 기자에 전화해 '주가가 떨어지면 책임질거냐'라며 1시간 동안 으름장을 놓는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어느 연예지 편집국은 특정 연예인 기사를 쓰면 사무실에 설치한 전화의 선을 뽑아 둔다. '우리 오빠는 절대 그런 적 없다'는 항의가 하루 종일 이어지기 때문이다.


기자는 분명 어떤 분야에서 사실 관계와 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건 맞다. 취재를 통해 보도를 할 수 있는 내용보다 소위 '오프 더 레코드'란 전제로 얻게 되는 정보들이 많기 때문이다. 다루지 못하는 갖가지들을 제외한 뒤 보도가 이뤄지는 것들은 매체별 논조에 따라 '더'와 '덜'이 녹여진 우선순위가 달라질 뿐이다. 다만 정보의 우위에 있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기사란 도구를 활용한다고 해 분석으로 둔갑한 평가는 경계해야 한다. 그럴 자격은 없는데 평가가 책무라 착각하는 순간 우리의 본질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것 밖에 되지 않기에 그렇다.


그래서 딱 적절한 현상을 다루는 '중계'가 어쩌면 맞는지도 모르겠다. 이달의 기자상을 받는 것보다 티나지 않게 오래 직무를 이어가는 것이 영끌을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지 혹시 아는가. 다른 이에겐 이 적당함이 은밀한 협상을 통해 중계권을 손쉽게 다루는 위정자 그룹으로 건너가는 발판이 되기도 하니까. 말 못할 불문율이 절대로 깨질 수 없는 건 이런 곳곳의 니즈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중계자가 되고 싶었을까, 일을 하며 한번씩 공허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곤 하는데 또 하나의 이유를 이같이 적립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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