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ul Oct 28. 2022

18시 30분에 다시 출근하는 사람들

누군가는 퇴근할 무렵, 다른 이는 또 다른 업무를 위해 떠나고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Paul 제공

최근 근무를 일찍 마치고 출입처 홍보팀과 밥을 먹은 바 있다. 멀리서 오는지라 중간에서 만나야 했고 그 지역은 우리 회사가 있는 곳이었다. 퇴근 방향과 역방향으로 도로를 달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차가 막하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그런데 내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내가 달려가는 방향에서도 퇴근자가 있다는 당연한 이유에서였다. 6시 30분이 약속 시간이었는데 1분, 3분, 10분씩 내비게이션의 도착 시간이 늘어갔다. 지금이라도 조금 늦는다고 연락을 해야 하나 오금이 저려올 때 가까스로 주자창에 차를 넣을 수 있었다.


헐레벌떡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약 10분 정도 일찍 와있던 동기와 홍보팀 직원 2명이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인기척을 하니 직원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곧바로 지갑에 있던 명함을 꺼내들었다. 명함을 교환해 식당 테이블에 올려둔 뒤 자리에 앉았다. 연예부를 출입할 땐 대개 나이가 젊은 직원들이 다수였다. 정경사로 넘어오고 나서는 연배가 훌쩍 뛰었다. 이번 식사도 그룹장과 팀장이 오셨는데 아버지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리신 것 같았다.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진풍경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누구든 수저통과 물컵이 가까이에 있으면 일사분란하게 분배를 하면 된다. 그러나 이같은 류의 식사 자리에서는 홍보팀 직원들이 극구 말리곤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어떻게 시작된 문화 같지 않은 루틴인지 모르겠으나 말이다. 이후 친밀도를 높이기 위한 수단인 술이 잇따라 주문됐다. 술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드리니 '세상에 이런 기자가 존재했나' 싶은 표정을 짧게 표출한 직원들은 고기를 구우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직원 한명을 붙잡아 코카콜라를 주문해주시는 배려를 전해줬다.


원하고 궁금한 이것저것을 묻기 전에 워밍업은 일과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보통 어디에 집이 있는지, 출근은 어떻게 하는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등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우리 회사와 홍보팀 직원들이 있는 회사 모두 명함 디자인이 다양해 한동안 그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회사는 사회공헌사업을 진심으로 하고 있었다. 보호종료아동 등을 중심으로 회사 인프라를 선용할 수 있는 사업들이었다. 나도 꽤 오랜시간 이 분야에 몸담고 있었으니 물어볼 것도, 전해듣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나 정년퇴직을 앞둔 내가 있을 부서는 아마 이런 곳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더 나눴다. 꽤나 느낌있는 바(bar)였는데 콜라는 팔지 않았지만 분다버그를 팔고 있었다. 어학연수 시절 즐겨 마셨던 진저비어맛을 마주하니 퍽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N년차라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할지 어느정도 확립했는데 새삼 영락없는 직장인이 돼 버린 내가 다소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령 송도에서 남과 북 지역을 나눈다고 했을 때, 남 지역은 채드윅국제스쿨이 있는 높은 교육열로 유명하지 않냐로 맞받아치는 등이었다. 이 답을 내놨을 땐 '내가 왜 이걸 알고 있지' 했다. 아직 어른이란 말은 어색하다고 우기고 싶은데 점점 이 우김은 객기에 지나지 않다는 점도 스며들면서 말이다.


나처럼 글을 전공한 사람이거나 커뮤니케이션학과 등을 공부했거나 하고 있다면 한번쯤 꿈꿔봤을 직군 중 하나가 언론홍보 아니겠는가. 내가 강력히 주장하고 싶은 건 이 직군을 홍보로 두는 게 아니라 영업 직군 밑에 둬야 한다는 점이다. 이 업무 10할 중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나같은 사람과의 신경전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회사를 홍보하는 사람들이란 일차원적인 생각을 꿈꾸고 취준생 시절 여러 기업에 지원서를 넣으려했던 나를 지금 만난다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것이다. 그리고 "1년 365일 휴대전화를 붙들고 수려한 언변으로 평일 주말 없이 살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이 업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지만.


아버지 얼굴도 떠올랐다. 이처럼 대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하시진 않지만 적지 않게 업무와 관련한 사람들을 만나 소통하시기 때문이다. 지금은 없지만 불과 몇년전 내가 대학생일 때 이사급 사람들이 아버지를 힘들게 한다는 말을 안방 너머 들은 기억이 있다.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와 다른, 때론 맞지 않고 아주 고약한 누군가를 줄지어 만나며 일을 한다는 게 좀 어렵겠나.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견디신 뒤 정년을 바라보시는 아버지가 대단하다 여겨졌다. 이날 저녁을 함께한 홍보팀 직원들의 얼굴에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가장의 향기가 짙게 새어나왔다. 그들이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갖가지 일화를 통해 느끼면서.


늦은 밤 자리를 파하고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를 빼기 전 두명의 직원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막연한 감사를 섞었다. 문자를 전송한지 5분도 지나지 않아 답장들이 도착했다.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상투적인 내용과 함께 눈길을 끄는 문장이 있었다. 다음엔 술을 빼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큰 대기업에서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 거라 짐작은 했었다. 일종의 전략도 존재했겠으나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순간을 캐치해 진심으로 전하는 방법, 사소할 수 있는 이것이 오늘날 한 기업을 대리하는 위대한 책무를 맡은 이유겠다 싶었다.

작가의 이전글 실명으로 중계하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