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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Nov 01. 2022

익숙함을 저 멀리 던지고

과거엔 바다를 봐도 그냥 그랬는데 요즘은 이 풍경이 꽤나 좋게 보인다. Paul 제공

각종 조직개편과 인사발령이 계속되면서 업무 스케줄이 다음주를 내다보기 힘들게 됐다. 이에 선임 선배를 중심으로 시간이 나면 무조건 연차를 소진하라는 귀뜸이 단체 대화방을 통해 전달됐다. 애석하게도 올해 첫 연차를 사용한 달은 지난 9월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네 인생이 그렇지 않나'는 푸념 밖에 늘어놓을 게 없다. 워라밸이란 그저 MZ세대 관련 뉴스를 다룰때나 사용하는 피상적이면서도 모호한 어떤 책에 등장하는 단어일 뿐.


운이 좋게 11월에 들어서야 연차를 사용할 수 있는 근무시간이 주어졌다. 잽싸게 보고를 올린 뒤 선택한 여행지는 제주도였다. 사실 해외를 또 나가고 싶었는데 세계 각국에서 코로나19 방역 조치를 때마침 완화해 비행기 값이 최소 2배가 뛰었다. 일본 도쿄만 해도 왕복 60여 만원이 드니 올해가 가기 전 카드빚에 내가 파묻힐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집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긴 싫었다. 물론 게으름을 피워봐도 좋지만 젊을 때 다녀야지 언제 다니겠나 싶어 비교적 합리적인 카드빚을 만들게 됐다.


여행은 익숙함과의 결별이라는 사실을 이번에도 깨닫게 된 바 있다. 혼자 제주도에 와서 뭐 그리 대단한 이동수단이 필요할까 싶었다. 내 차와 동일한 모델을 제주도에서 타고 다니려면 족히 수십만원은 깨질 것 같았다. 이에 사이트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올라온 '아침'을 선택했다. 대학생 때도 제주도를 가면 주로 이 차종을 이용했으니 별 무리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차를 받고 운전석에 앉았는데 너무 작게 느껴져 불편함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아무리 엑셀을 밟아도 rpm이 딸려 속도를 좀처럼 올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발생한 사건 아닌 사건이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숙소로 오는 길에 한참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분명 간격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 트럭이 답답한 앞차를 피하기 위해 무리하게 끼어들려고 했다. 서울 사람은 출퇴근길 경부고속도로와 올림픽대로를 내달리던 경험치를 살려 경적과 함께 끼워주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 정차 신호에서 트럭 운전자는 창문을 내려 '빨리 좀 달리든가'라며 뭐라뭐라 한참 말을 했다. 그러면서 창문을 좀 내려보란다.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신호가 바뀌었고 난 다시 속도에 맞춰 운행을 시작했다. 그가 원하던 대로 창문을 내려줬다면 지금 이 시간에 노트북을 들진 않았겠지.


서울에서 내 차 만큼 밟아도 속도가 마음처럼 나가지 않는다는 자초지종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답답한 마음이 굴뚝 같았다. 뭘 어쩌겠는가 차가 이런 걸. 해당 상황까지 겹치며 자칫 화가 날 수도 있었는데 문득 그냥 천천히 가보자는 생각이 스쳐갔다. 서울이었다면 복잡한 도로를 요리조리 추월해 빠져나갔을 것이지만 말이다. 조금 빨리 간다고 해 어찌 되는 것도 아닌데 조급함이 내재돼 이걸 당연하다 여기며 살았구나 싶었다. 5분 빨리 가는 것보다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르는 게 중요한데. 더군다나 지금은 여행 중 아닌가.


아까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한 승객이 전화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으며 '네 주무관님'이라고 말을 맺은 걸 보니 공무원이 분명했다. 가족과 휴가를 왔는데 누군가 급한 일로 찾은 데 따른 여파였다. 이 멀리 제주도를 와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했는데 오늘 하루 동안 업무 연락이 왔다갔다하는 단체 대화방을 접속해보던 나였다. 심지어 다음주에 잡힌 팀 회식에 참석하겠다는 답도 보냈다. 부디 내일은 저녁 시간 즈음에 끝없이 펼쳐지는 붉은 색의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있길 소망해본다. 좀 맛있는 커피를 손에 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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