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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Nov 05. 2022

사소할지라도 사소하지 않은 것들

천원짜리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지만 김영란법에 걸리지 않는 비타500기자도 나름 괜찮지 않나. Paul 제공

어렴풋이 기억나지 않지만 약 3주전 쯤 이메일로 자신을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소개한 친구의 요청이 들어온 바 있다. 학교프로그램으로 진로 설정을 위한 직업인 탐색을 해야 하는데 내게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묻는 내용이 담겼었다. 하도 흉흉한 세상 탓에 직접 해당 학교로 확인 전화를 해보니 실제로 그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게 맞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된다면 꼭 수락해달라는 당부도 학년부장 선생님은 잊지 않으셨다. 떄마침 비는 시간이었고 얼마나 고민하며 이메일을 보냈을까 싶어 학생의 제안을 수락하게 됐다.


미리 묻고 싶은 질문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정리해 보낸 것인 듯 했다. 학교에서 강제로 진행하려는 프로그램이 아닌 정말 원하는 꿈을 위해 나아가려는 학생들의 마음이 빼곡한 질문들에 담겨있는 것 같았다. 형식적으로 답할 수 없는 것들이 다수 포진돼 있었기 때문이다. 질문지를 받았던 날은 학생들을 만나기로 했던 날을 2주 가량 앞뒀을 때였는데 이유 모를 기대감이 마음 가득 들어찼던 기억이 있다.


당일이 됐다. 아주 추워진 날이었고 두꺼운 옷을 껴입지 않으면 금방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둔 뒤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내 휴대전화로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후 만난 학생들은 아주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저 나이에 그랬나 싶은 아저씨 같은 생각이 잠깐 스치기도 했다. 어색한 인사를 주고 받은 후 카페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학생이 보고서를 위해 녹취를 하겠다고 알렸는데 인터뷰 기사를 위해 녹음기를 내밀던 인턴기자 시절이 떠올랐다.


이야기는 사전 공유된 질문과 새로 준비한 궁금증들을 섞어 진행됐다. 고등학교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고3 때 CGV VIP 였다는 건 숨기고), 대학 생활에서 꿈을 어떻게 구체화했는지(일반화학 D를 받고 자체 휴강도 많았다는 것 역시 숨기고) 등을 잇따라 나눴다. 또 어학연수와 인턴을 통해 직무를 설정하고 나아갔던 사례도 말이다. 이 이야기들은 여러 자리에서 하도 말해 눈을 감고 있어도 툭치면 나오는 것들인데 눈을 초롱초롱히 하면서 경청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꽤나 감사했다.


그렇게 한시간쯤이 흐르고 조촐한 만남은 마무리됐다. 학생들은 만나줘서 고맙다며 3만원이 넘지 않는 비타500 박스를 건네줬는데 출입처에서 줬던 어떤 선물보다 귀하다 여겨졌다. 멀리서 왔기에 나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어 회사 볼펜과 메모지, 지우개 등을 동봉해 전달했다. 입직하고 첫 출근날 모든 걸 꼼꼼히 메모하라며 기자협회수첩을 건네줬던 한 선배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이 친구들이 훗날 기자가 될지 아니면 다른 꿈을 찾아 나설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꿈꾼 직업,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라도 계속 메모지에 끄적이다 보면 이만큼 모인 과정들은 결코 이들을 배신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어떤 기자들에 이메일을 보냈냐고 물어보니 우리 회사를 비롯해 몇몇에게 내용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회신을 준 사람이 나뿐이었다고 했다. 물론 시간이 비어 자유로웠던 내가 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돈을 쓰는 것 만큼 누군가에게 시간을 쓴다는 건 쉽지 않다고 말하는 세상이란 게 실감이 나긴 했다. 대단한 자리에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잘해서가 아닌 많은 도움 덕분이다. 그렇기에 정말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나서야 할 책무가 있다고 본다. 나누면 2배가 된다고, 이 친구들도 언젠가 잠정적 후배들에게 이같은 가치를 전해줄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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