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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Nov 13. 2022

가끔씩 찾아오는 어느 허탈감

기자를 꿈꾸는 고등학생들이 내게 보내준 질문지. 섣불리 답할 수 없는 문장들이 빼곡했다. Paul 제공

얼마 전 회식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주머니 속에서 꺼내 들어보니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였다. 입직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 게 딱히 두렵지 않았는데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좀 두려워졌다. 기자들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시달리는 기업 홍보담당자나 교수 등 지식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심호흡을 한 뒤 수신 버튼을 눌렀다. 발신지는 민원 처리 부서였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한 사건의 가해자 부친이었는데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기사로 악플을 받고 있으니 삭제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었다. 보통 취재를 통해 사실관계가 확인돼 출고된 기사는 절대 내려가지 않는다. 다툼의 여지가 있는 내용일지라도 어느정도의 톤이 조절될 뿐 이 경우 역시 기사가 삭제되는 법은 없다. 그렇지만 일단 이같은 민원이 들어오면 데스크(부장)에게 보고를 하고 논의를 해 처리 결과를 통보해야 한다.


우선 당시 데스킹을 담당했던 선배에게 연락을 드렸다. 당연히 선배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커뮤니티 글을 다룬 것도 아니고 경찰 확인과 추가 취재를 통해 내용을 덧붙여 기사화했기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민원인은 꽤나 강경해 보였다. 이럴 땐 아주 중요한 이슈가 아닌 이상 상황 종료를 위해 기사 삭제를 하기도 한다. 이번 이슈도 그래서 삭제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순간 '그래도 하루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란 생각과 함께 짧은 허탈감의 한숨이 터져나옴을 느낄 수 있었다.


예상대로 2차 가해 우려 등을 위해 기사를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데스크에게 보고를 했고 해당 결정을 실행하기로 했다. 회식을 하다가 이 무슨 일인지 고깃집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서 조그마한 휴대전화로 고군분투를 시작했다. 손이 이렇게나 두꺼웠나 싶었지만 사내 메일함을 열어 민원 처리 담당자에게 결과를 열심히 적어 통보했다. 기사 삭제는 언제나 아쉬운 마음이 크다. 다만 수습을 했으니 어쨌든 다행이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됐다.


이후 잊고 있었는데 이틀쯤 지났을 무렵 저녁 시간에 다시 민원 부서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민원인이 또다시 민원을 제기한 것이었다. 경찰에 확인해보니 기자에게 확인해준 사실을 말해줄 수 없다고 했고 어떻게 사건을 입수했는지 나와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고 말이다. 당연히 경찰이 일반인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해줄리 만무했다. 민원 처리 담당 부서 직원도 난감해하는 모양새였다. 더 나올 답변이 없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데스크도 동일한 생각이었고 '추가 답변을 드릴 수 없는 점 양해바란다'는 내용의 회신만 전달했다.


이날 역시 저녁을 막 먹고 있을 때였다. 하도 답답한 마음에 그 기사를 찾아보니 다른 매체들의 기사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냥 우리 매체가 싫어서 그랬나란 심술이 마음을 스쳤다. 그리고 또 한번의 허탈감이 입밖으로 내뱉어졌다. 민원인이 원하는 대로 곧장 기사를 삭제한 회사가 미워서는 아니었다. 이 업의 종사자로서 겪어야 할 몇가지 상황 혹은 순간들이 있는데 이번 일도 그 가운데 하나다. 몇번 겪어봐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영 그렇지 못하다. 땅바닥 어딘가에 내려 앉은 한숨이 켜켜이 쌓여갈 뿐.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어떤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좋았던 딱 하나의 순간이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내게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노트북을 닫을 때 '오늘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는 작은 뿌듯함이 내일 다시 노트북을 열게 해주는 힘이 되곤 했다. 안타깝게도 가끔씩 찾아오는 이같은 허탈함들은 원동력보다 우위에 있는 듯 하다. 분명 자신있고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게 맞나?' 여러번 되묻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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