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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Nov 14. 2022

변함없이 흘러 넘쳤으면

퇴근하고 별 약속이 없으면 옷가게를 방문한다. 뭘 사려는 건 아니지만 혹시나 얻을 활력을 기대하며 말이다. Paul 제공

최근 습관처럼 백화점을 방문했었다. 스케줄이 오락가락한 탓에 오전, 오후, 저녁 등 시간대는 다 달랐지만 어쨌든 짬이 나면 무조건 백화점으로 향했다. 딱히 살 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생일 주간과 맞물려 뭐라도 하나 사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동안 별다르게 옷을 사지 않았었는데 생일을 핑계로 하나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백화점에 들어서면 눈에 불을 켜고 주요 브랜드들을 둘러봤다. 좋아하는 폴로부터 라코스테, 메종, 스튜디오톰보이 등 뭔가 득템할 수 있을 것 같은 곳들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약 2주 동안 이 루틴을 이어간 바 있는데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신상이라고 해도 내 옷장으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옷 가운데 살 게 없다니 참 웃긴 상황이었다.


구체적인 목표 설정을 하지 않아 번번이 실패하는 것 같았다. 이에 겨울을 맞아 즐겨 입을 수 있는 트위드 블레이저를 목표로 삼았다. 백화점에 입점된 겨울 블레이저들은 해리스 트위드로 만든 것들이었다. 가격은 대부분 60만원대였다. 입어보니 겨울 동안 니트와 함께 잘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긍정적인 반응을 캐치했는지 점원들은 세일이 조만간 마감되거나 사이즈가 한개 뿐이라며 적극 영업에 나섰다.


세일에 임직원 카드를 적용하면 매우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결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5살만 어렸어도 일단 카드를 내밀고 봤을 텐데 요즘 옷가게에서는 꽤 보수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실제로 고민을 했던 2개 브랜드가 있었다. 열심히 거울을 보며 얼마나 자주 입을 수 있을까 점을 쳐봤지만 좀 더 고민하겠다는 말을 남긴 뒤 재방문을 하지 못했다.


이런 걸 철이 들었다고 하나. 자꾸 방에 있는 옷장 3개가 눈에 밟혔다. 이들 속에는 입은 횟수가 2번에 지나지 않은 맨투맨과 후드티 등이 쌓여있다. 날씨가 추워진 근래에 해당 옷들을 꺼내입으며 여러 생각이 스쳤다. 특히 많이 들었던 생각은 '옷이 참 많네'였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옷들을 이미 다 사뒀기 때문에 아무리 신상을 봐도 큰 흥미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옷을 사지 않은 건 절약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내게는 다른 의미로 취미가 사라진 것이었다. 굳이 사지 않더라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게 산적한 스트레스를 푸는 하나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이에 내게 관련 질문이 들어올 때면 자신있게 쇼핑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직장인인데 취미가 있냐"는 이상한 말로 되묻곤 한다.


넘치지 않는 적당함이란 무엇인지 본의 아니게 알아가고 있기도 하다. 요리조리 TPO에 맞게 잘 맞춰 입는 게 넘쳐 흘렀던 걸 잘 주워담는 방법이겠거니 생각해본다. 그래도 아직은 훗날 생긴 자가의 한 방을 드레스룸으로 꾸미고 싶은 소망이 남아있다. 본디 사람은 변하지 않기 마련인데 나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이 철없음은 오래도록 머물러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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