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를 밟게 되는 순간

by Paul
IMG_4348.jpg 일단 목적지라고 하는 곳에 가보면 막상 목적지가 아니었다. Paul 제공

근래 몇 스케줄 때문에 좀처럼 하지 못했던 운동을 다녀오는 길에 한 가족을 보게 됐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들 둘. 드라마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장면이 내 눈 앞에서 그러졌다. 누가봐도 철이 없어보이는 막내 아들이 가족이 걸어가는 대열을 이탈해 조그맣게 마련된 풀밭에 들어가 뛰기 시작했다. 그쪽은 길이 아니라며 엄마의 채근이 시작됐지만 막내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금은 의젓한 티가 났던 첫째는 물끄럼이 동생을 바라보더니 역시 풀밭으로 들어가 동생과 놀기 시작했다. 엄마는 더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아빠와 함께 희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지켜봤다.


이들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자 맞벌이를 할 것 같은 젊은 부부와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학교는 운동을 하기에 꽤 가파른 언덕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가족에겐 높은 경사가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름의 끝무렵,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며 저녁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이 감사하다는 얼굴이었다.


학교 정문을 완전히 벗어났을 무렵엔 편의점 앞을 지나는 한 커플이 있었다. 보편적인 생각으로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직장인 두명 같았다. 엄청 친밀하게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 주말을 맞아 선을 봤거나 혹은 이제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임이 분명했다. 발맞춰 걷는 모습이 어찌나 설레보이던지. 그들도 시간을 파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누울 때면 오늘 있었던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며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새벽이 다가오도록 잠에 들지 못할 수도 있다. 때마침 내일은 공휴일이니 닭이 울 때쯤 아주 뜨거워진 전화기를 충전기에 꽂아두고 이불 속에 들어갈지도.


학교 거리 앞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수많은 아파트가 눈을 사로잡았다. 빼곡히 솟아오른 저마다의 집에는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찬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순간 내 입가를 멤돌던 말이 있다. 이제 집만 있으면 되는 건가.


사회에서 알아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소위 명문대학은 아니지만 주요대학의 들어가기 힘든 학과를 졸업했다. 운이 좋게 인턴을 마친 뒤 그 분야에서 알아주는 직장에 취업도 했다. 대기업의 성과급만도 못한 급여를 받지만 잘 아끼고 모아 당직 때 좀 더 편하게 오갈 수 있는 자동차를 구입했다. 이제 한국, 아니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인간이라면 으레 거쳐야하는 단계를 하나 혹은 두, 세개쯤 남겨두고 있다. 아마도 내가 오늘 지나쳐온 모습들이겠지.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걸음을 멈추고 한 5분 남짓 생각에 잠겨봤다. 돈을 버는 이유는 뭘까, 이런게 인생일까 하고 말이다. 동시에 2년 전 지인의 권유로 읽어본 책 '팩트풀니스' 내용이 떠올랐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특정 부유국에서 1년에 생산하는 쌀의 양은 전 세계 굶주리고 있는 개도국 인원의 전체가 충분히 먹고도 남는다. 마음만 먹으면 형식적인 원조를 직접적으로 바꿔 세계 어디서든 가난, 전쟁 등에서 파생되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으나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균형을 맞춰야하기 때문에.


대학시절, 지역아동센터와 공부방에 나가 봉사활동을 했다. 오랜 시간 몸담았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을 얻지 못했다. 왜냐, 가령 대학진학을 앞둔 혹은 취업을 고민하는 공부방 아이들을 만났을 때 해줄 말이 없어서다.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서 꿈을 이뤄봐의 꿈은 도대체 무얼 의미한단 말인가. 내가 지나온 과정들을 답습하는 게 인생을 잘 사는 것인지 오늘도 여전히 '그렇다'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난 멋드러진 조언을 해주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도와줘야 할, 그리고 도움받아야 할 기준 또한 헷갈렸기에 그랬다.


돈 걱정하지 않으면 세상은 꽤나 재밌다. 누군가는 아니라고 부정할지 몰라도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건 세상에 없는듯 하다. 성인이 되고 용돈을 타지 않게 되면서부터 학생 때 하지 못했던, 사고 싶은 옷을 무작정 사 옷장을 2개, 3개 늘려봤다. 하지만 몇 달 전 흥미를 잃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다양한 브랜드에서 새 디자인의 옷이 쏟아지고 마음만 먹으면 내 옷장 속 옷걸이에 걸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본질을 되묻게 되면서 이같은 결과를 도출하게 됐다. 좀 나아가려고 하면 해당 생각에 다시 원점으로, 다른 것을 붙들고 나아가려면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 중인 셈이다.


아주 무더운 여름날 막상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은 벌컥벌컥 많이 마시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날은 이 차가운 물이 10번, 20번 위에 구멍이 뚫린 마냥 들어갈 때가 있다. 갈증의 원인을 되짚어보지만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물이라는 해결책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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