곯아도 티 내면 안 되지

by Paul
KakaoTalk_20250106_144908974.jpg 태국에서 저렴하다는 스트랩실을 사올 때 설마 이걸 다먹겠나 싶었는데 어느새 한 통을 다 비웠단다. Paul 제공

주말 당직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회사로 들어갔다. 어디로 팔려갈지 몰라 일단 옷을 있는대로 껴입었다. 보도국에 하나둘씩 모였고 편집회의 들어가기 전 부장이 발제를 지시했는데 내게는 사건사고 현장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웬걸, 그 현장은 어제 내가 갔다가 킬(kill)됐던 곳이었다. 주말에도 다루진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철수하라고 했었는데 말이다. 따지도 않은 사연을 덧붙여달라고 하는데 말문이 턱 막혔다.


안 되면 되게 하라고 다행히 어제 타사가 풀(pool)해준 현장 이야기가 도움이 됐다. 기사 구성을 하고 있는데 부장이 내게 오더니 어제와 다른 기사를 쓰라고 했다. 사건사고 기사에서 팩트 말고 다른 기사를 쓴다라. 참 추상적이고도 어려운 주문이었다. 본인도 그걸 잘 알테지만 어제 내용을 있는 그대로 나갈 순 없는 노릇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제로 끝난 현장을 굳이 기사로 쓰는 건 주말 아이템이 없어 끼워야 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이날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최근 주말 내내 출근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슈를 붙들고 매주 금요일 주말에 출근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는 참이었다. 주말은 무조건 추운 현장으로 가야했고 밤늦게 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가운데 지방 출장까지 겹치며 시간을 나노 단위로 쪼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좀 쉬어줘야 다시 체력을 회복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계속 꾸역꾸역 정신력으로 일을 하는 느낌이랄까.


당연히 몸에 이상이 찾아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기침이 코로나처럼 계속 나왔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선배를 비롯해 팀원들이 모두 아프기 시작했다. 내가 쉬면 누군가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니 다들 별소리 없이 참고 일하는 듯 했다. 소비만 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주말에 쉬지 못한다는 애석한 현실보다 나를 더 서글프게 했던 것 같다.


점심을 먹고 곧장 현장으로 갔다. 택시를 타고 중간 지점에서 선배를 만나 같이 취재차를 탘고 이동하는데 머리가 너무 아팠다. 식은땀까지 났는데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미 내 기사를 위해 많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으니 섣불리 중도 하차를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때마침 가방이 고장나 다른 가방을 갖고 출근하는 바람에 약을 집에 두고왔었다. 얼른 현장에 도착해 인근 약국을 먼저 방문해야겠단 생각 뿐이었다.


이후 재빠르게 약국으로 가 그동안 광고에서 숱하게 봤던 '감기 시작했다 판콜 마셨다'를 실천해봤다. 일을 해야 한다는 의지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CF처럼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건지는 몰라도 꽤 괜찮은 컨디션으로 취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장 인근에서 기사를 무사히 마감할 수 있었다. 기사를 위해 나와 연락했던 한 선배는 '피곤한 사람에게 디테일이 잘 들리지 않는 마법이 있다'란 위로 아닌 위로를 날려주시기도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경험 많은 선배는 알고 있었던 걸까.


다시 택시를 타고 복귀를 하는데 내 가방 옆에 놓여졌던 판콜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럼히 바라보는데 순간 일을 하기 위해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살기 위해 일을 하고 있는지 헷갈렸다. 후자가 되어야 하는데 약까지 먹어가며 일하는 걸 멈추지 않는 근래 모습에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단 생각을 지울 순 없었다. 이런 모습들이 보이면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깨어 있는 캡(사회부 기동팀장)이 되는거겠지 싶었다. 기자를 하는 누군간 그게 목표일 수 있으나 분명하게도 난 아니라는 걸 이날도 깨달았다.


주말 동안 내 기사를 봤다는, 평소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의 연락을 갑자기 많이 받게 됐다. 자랑스럽다 혹은 대단하다란 후기를 전해들으며 멋쩍은 반응을 보이며 웃어 넘겼다. 부모님 뿐만 아니라 지인들도, 주변에 잘 없는 특이한 직업인 기자가 지인이란 점이 신기하면서 퍽 마음에 드는 모양샌가 보다. 심지어 내가 알지 못한는 어머니 직장의 동료까지 내 기사를 챙겨본다는 말을 들으면 더 그렇다. 이런 말이 귀로 들어올 때면 참 부담이 된다. 나는 곯아가는데 누군가의 기대란 무게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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