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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Sep 01. 2022

선험의 다른 의미, 감사

PPT는 내 평생 전혀 고려되지 않은 불청객과도 같다. Paul 제공

지난달 31일 휴무를 내고 저녁에 모교로 특강을 갔다. 많은 인원을 상대로 한 건 아니었지만 기자가 되고 싶은 후배들이라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리 넓지 않은 강의실에 앉은 후배들은 무언가라도 받아적으려고 노트북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꼭 출입기자단을 상대로 브리핑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귀한 자리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니 나도 참 나다 싶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강의 준비를 단단히 하지 못한 바 있다. 그래도 하루 날을 잡고 PPT를 구성했고 다른 날에는 꼬박 하루를 방에 박혀 논술 첨삭을 준비했다. 논제에 대해 열심히 본인의 생각을 써 내려갔을 후배들 얼굴이 떠올랐다. 이 시기를 지나왔는데 이제는 어떤 것에 대해 몰입할 정도로 노력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싶어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이런 게 삶이지 위로를 해봤지만 씁쓸함은 내 곁을 아주 멀리 떠나지는 않은 듯 했다.


특강을 진행하는 동안 후배들의 눈은 빛이 났다. 막연한 취업시장에서 갖가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거는 기업의 횡포를 온 힘을 다해 대치하고 있는 이들 아닌가. 대단하지 않은 내가 현업에 있다는 이유로 연사가 됐다는 점이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실제로 특강 내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잘 말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끊임 없이 들었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현란한 단어들을 조합해 이리저리 말을 쉬지 않고 내뱉을 수 있었다. 그렇게 1시간 30여 분이 지나갔다.


듣기 좋은 말일 수 있겠으나 후배들의 피드백은 감사했다. 고민하던 부분에 대해 어느정도 돌파구를 마련한 것 같다는 후기들은 특강이 나름의 성공을 이뤘다는 토닥임을 내게 줄 수 있었다. 특강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는데 한 학생이 쫓아나왔다. 특강을 주최한 교수님께서 꼭 나를 차까지 데려다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한사코 말렸으나 학생은 주차장까지 따라왔다. 내가 뭐라고 이런 대접을 받을까 신기했다. 언젠가 학교에 온 강연자들을 볼 때 나도 저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정말로 꿈이 이뤄진 셈이다.


어떤 내용을 전했는지 복기하면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강 동안 들었던 한가지 마음은 있다. 난 내가 잘해서 지금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역량이 뛰어나도 이를 발굴하고 키워갈 수 있도록 조력을 제공해주는 이가 없으면 가질 수 없는 전시장의 영롱한 보석과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취준생이던 시절, 도움을 청할 선배를 찾지 못해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비로소 원하던 현업에 있는 내가 나누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다양한 종류가 있는 감사가 이날은 다소 복잡한 성격으로 마땅한 카테고리를 찾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이후 주최자이신 교수님께 연락이 왔다. 60명 수업에 와서 특강을 해줄 수 있냐고 말이다. 또 다른 기회가 내게 도달한 것인데, 점점 사이즈가 커지니 잠시 멈칫했다. 그래도 후회로 남지 않는 삶이 되려면 담대히 취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강의를 수락했더니 관련 학부생이 아닌 다른 학생들도 와서 들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시겠단다. 120개의 눈도 많은데 여기에 플러스 알파라니. 하여튼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인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후회는 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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