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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폴리 Oct 14. 2018

내가 숨을 거두면 이렇게 해줘

미리 써보는 유서

추석 때 친구와 잡다한 수다를 떨다가 묘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명절이다 보니 성묘를 다녀오고 차례를 지낸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내가 죽으면 어디에 묻힐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어느 정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기에, 죽음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이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어디에 묻힐까'부터 '내가 죽으면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남길 것인가?'까지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걸 글로 적으면 유서라고 하나요?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미리 유서를 써보고 싶어 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어보게 된 이른 유서를 여러분께 미리 공개합니다.





무슨 말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친구한테 말하는 편한 말투로 인생을 마무리해볼까 해. 


단지 상상으로 내 죽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손이 떨리기 시작했어. 이렇게 숨을 거둔다니 조금.. 아니 많이 아쉽네.


생각해보면 꽤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잘 살았던 삶이었는지 확신을 가지지 못해 아쉬워. 하느님도 열심히 믿고, 성당도 매주 안 빠지고 잘 나갔는데 기왕이면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 나온 지옥들 기준이라면, 나도 많은 벌을 받긴 할 텐데 조금은 무섭다. 내가 상처 준 사람들도 많고, 미워한 사람들도 좀 있었는데.. 좀 더 착하게 살 걸 그랬어.


'살고 있다'라는 말이 소중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 누가 안부를 물으면 흔히들 "저 요즘 잘 살고 있어요."라고 답하잖아. 죽으면 이제 이런 말 못 하는 거잖아. 좀 가슴이 아프다, 그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날 오래도록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영화 코코에도 나오잖아. 죽은 사람을 기억해주는 이들이 없어지면, 그 영혼의 존재가 사라진다고. 정말 그러지는 않겠지만, 나는 관심받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게 오래도록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했어야 기억을 오래도록 해줄 텐데. 그랬으려나 모르겠네.


일단 우리 가족, 부모님과 동생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


정말 고생 많이 하셨고, 지금도 하시고 계신 우리 엄마. 아버지가 오랫동안 일 때문에 해외에 계셨어서, 아들 두 명을 혼자 키우다시피 했던 우리 엄마. 내가 중학교 때 엄마가 내게 써줬던 편지, 사실 아직도 가끔 봐요. 정말 고생 많이 하셨죠. 아들 두 명 모두 대학 졸업시키고 사회생활까지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신 우리 어머니. 지금은 동생 애기들 보느라고 또 힘들어하는 어머니. 이제 정말 할머니 다되셨네. 둘이 함께 베트남 갔을 때 추억이 많이 남았어요. 앞으로 종종 가족이서 여행가면 좋을 것 같아요. 전화도 더 자주 하고 안마도 좀 자주 해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했어요. 사랑합니다.


오랫동안 해외에 계셔서 생각보다 친하지 못했던 아버지. 아버지랑 초밥 먹으면서 소주 마셨던 때가 생각나요. 그리고 몇 년 전 아버지가 아파서 수술을 받았을 때, 그때부터 아버지가 좀 작게 보이기 시작했어. 어렸을 땐 그렇게 커 보이던 분이 이제 내 눈에 작아 보이고 안타까워 보였다니. 이제 아버지도 나이가 드셨구나, 항상 정정하신 그분이 아니라 내가 보살펴 드려야 할 사람이구나 느꼈어요. 사랑합니다.


동생. 이제 한 집안의 가장이 된 내 동생. 나보다 어느새 더 큰 세상을 보면서 살고 있겠구나. 네가 무슨 일로 잘못했었을 때 운동장에 세워놓고 형이 때렸던 그날이 아직도 생각나. 미안하다고 제대로 사과도 못했던 것 같네. 미안해. 언젠가부터 너와 친해지고 싶어서 정말 노력했었어. 너 고등학교 3학년 때만 해도 어디 같이 가자고 하면 내가 형이랑 왜 거길 가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네가 나한테 먼저 가자고 하고, 놀자고 했을 때, 은근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폴란드 여행을 함께 갔을 때 기억도 생생하단다. 그리고 너가 군대에 와서 같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또 너무 좋았어. 여러가지로 미안한 것도 많았어. 결혼할 때도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여러 가지 마음고생 서로 시켜서 너무 미안했어. 그래도 어떻게 한 사람과 평생을 살기 위해 결혼하겠다는 그 마음을 먹은 네가 참 존경스러웠다.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가정을 꾸린 것을 보니 형도 널 빨리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어. 고마웠어. 네가 내 동생이어서.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 아가들. 잘 자란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커서 둘 다 뭔가 아빠 엄마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아. 첫째는 아빠 어렸을 때 얼굴이 자꾸 있는데, 커서는 더 예뻐지자? 둘째, 내 대자. 아프지 말고 모든 어려움 잘 이겨내서 정말 훌륭한 일 하는 주님의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중에 보자 우리 둥이들. 사랑해.


친구들. 나와 함께 인생을 살아줬던 내 친구들. 하나하나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으나, 나와 유치원 때부터 함께한 친구부터, 학교 친구들, 성당 친구들, 대학원 친구들, 회사 동기들, 운동 친구들, 주위의 멋진 선후배님들까지 고마웠어요. 많은 분들을 보고 배웠으며, 함께 살아서 제가 잘 살 수 있었어요.


폴, 나 자신에게도 이야기해주고 싶어. 정말 수고 많았다고. 너 열심히 살았어. 엄청 굴곡 있는 삶은 아니었지만 힘든 일들도 잘 견뎌냈어. 어렸을 때 따돌림에 힘들어하기도 했고, 그 상황을 이겨내려 싸우기도 했잖아. 타지에 있는 아버지 전화가 일주일에 한 번 씩 오면 가족이 함께 전화받고 부둥켜 운 기억도 있다. 고등학교 때는 그렇게까지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 편입 공부도 열심히 했지. 결국 최종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 공부가 나중에 도움이 많이 되었잖아. 


나름 공부도 열심히 했고, 놀기도 열심히 놀았네. 군대 갔다 와서 필리핀과 캐나다 갔을 때는 정말 인생에서 가장 과제 없이 재미있게 살았을 때야. 대학교 3~4학년 때는 정말 열심히 했어. 하루에 3~4시간 자면서, 고시원 생활하면서 전 과목만 점 받은 적도 몇 번 있었네. 그래서 전액 장학금 받고 정말 뛸 듯이 기뻐했었어. 대학원 들어가서도 재미있게 잘 놀았는데! 좋은 친구들 만났어. 기숙사 살다 보니 정말 친해졌었어. 똑똑하고 착한 친구들과 어은동, 궁동에서 함께 밤새서 논 적도 많잖아. 회사를 와서는 뛰어난 선후배, 동기들도 많이 보고, 무엇보다도 디지털 동기들 디호스 친구들과 점심시간, 퇴근시간에 함께 할 때면 학교 다니는 것 마냥 너무 재미있었어. 고마웠어 친구들아. 그리고 사랑에 날아갈 듯 행복해하기도, 처절하게 가슴 아파보기도 했어. 결실은 못 맺었지만 뜨겁게 사랑해 본 것, 그게 어디야.


나름 잘 살았네. 근데 아쉬운 거도 많아.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 항상 운동해야 했는데 살은 항상 찐 것 같아. 하고 싶은 게 많았던 아이인데 이루지 못한 것도 많아. 내 음반도 내고 싶었고, 내 책도 내고 싶었고, 전시도 한 번 더 열고 싶었는데. 살면서 기획자로서 이름도 한 번 날려보고, 요가 선생님도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아,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보지 못한 것, 성가정을 이루지 못한 것도 좀 많이 아쉬워.


주님, 감사합니다. 사는 동안 의지 많이 했어요. 직접적으로 음성이 제게 들리진 않았지만, 저는 당신과 이야기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당신 덕분에 살면서 크게 엇나가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어요. 매 순간 감사하고 기도하지는 못했지만, 당신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어요. 가끔 무서울 때도 있고, 원망스러웠을 때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면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주셨던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늘나라 가게 해주세요ㅋ


음, 내가 숨을 거두면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조금 복잡하긴 한데 잘 들어봐. 일단 내 몸의 온기가 사라지면 다시 뜨겁게 타오를 수 있도록 화장을 해줘. 거기서 나온 유골을 2개로 나누어야 해. 이게 포인트야. 그중 하나는 내 가족들이 사는 곳에서 차가 막히는 것 까지 감안하여 차 타고 1시간 이내의 산에 내 나무를 하나 심어서 그 자리에 묻어주면 좋겠어. 조금 어려운 부탁일 것 같긴 한데 대모산이면 딱 좋을 것 같긴 한데... 거기 나무 심을 수 있나... 그리고 나머지 반은 제주도의 용두암 같은, 아니면... 강원도 양양이든 바다가 잘 보이고 뻥 뚫린 곳에 높은 곳에서 뿌려줬으면 좋겠어. 근데 날씨가 좋은 날, 하늘이 너무 맑은 가을날에 뿌려주면 좋겠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어. 봄은 안돼... 미세먼지가 많아서 섞일 것 같잖아. 


장례식은 장례미사로 치러줘. 마지막까지 주님 곁에서 잠들고 싶어. 매년 큰 제사는 없어도 좋아. 그래도 먹을 것은 많이 준비해줬으면 좋겠어. 매년 기일이 되면 제사 때 먹는 그런 음식 말고, 갈비 하고 좀 자극적인 음식이 준비되면 좋을 것 같아. 엄마가 한 음식들 맛있었는데... 김치찜, 고추장찌개, 간장밥, 김치전, 부추전, 고시히카리 흰쌀밥 그런 거 생각난다. 이런 음식들 차리고 기도하고 날 기억해줘. 그리고 모인 사람들끼리 맛있게 먹으면 그걸로 되었어. 음식 하느라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해줬으면 좋겠어. 난 살이 잘 찌는 체질이었으니까 마음껏 먹는 게 부담스러웠거든. 이제 천국에서는 살이 안 찔 테니까 많이 준비해서 먹자. 아, 그리고 청년 성가 틀고 몇 개 노래 불러줬으면 좋겠다. 아, 내 돈은 부모님 3분의 1, 동생 3분의 1, 그리고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단체에 3분의 1 이렇게 나눠주면 좋겠어. 


이렇게 쓰니까 대강 좀 정리된 것 같다. 저기 누가 날 자꾸 부르는 것 같아. 이제 갈게. 안녕, 잘 있어들.




제가 숨을 거둔다고 생각해보고 미리 유서를 써보았는데요. 진짜 죽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콩닥콩닥이는 걸까요. 적다 보니 제가 삶을 살면서 저에게 아쉬웠던 점, 더 하고 싶었던 것, 가족과 친구들에게 가지는 감정을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은 더 알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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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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