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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Mar 10. 2017

졸업식

 칼바람 부는 날. 장갑을 벗어 입김을 불어넣는 손가락은 벌겋게 얼어 있었다. 다시 장갑을 끼고 반대편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품에 살포시 감싸 안았다. 버스 정거장에서 만난 어머님과 함께 여자 친구의 졸업식에 가는 길이었다. 동생들의 졸업식도 한 번 간 적 없던 내가 여자 친구의 졸업식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버스에서 문득 그런 내 모습을 생각하니 피식, 하찮은 웃음이 나왔다. 버스 안에는 우리처럼 졸업식엘 가는 사람들과 학생들로 가득했다. 다행히 자리에 앉은 나는 흔들리는 버스에서 자꾸만 꽃다발을 공격하는 책가방과의 신경전을 벌여야만 했다.

 어머님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시면서도 자주 핸드폰을 두들기셨다. 졸업식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뒤 바로 일을 나가야 한다고 하신 어머님은 벌써부터 밥을 어디서 먹을지, 졸업식은 몇 시쯤 끝날 지를 걱정하셨다. 학교에 도착한 우리는 여자 친구와 짧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입구에서 나눠준 순서지를 보니 뒷면에 수상하는 학생들의 명단이 가득했다. 어머님은 무심하게 보시고 의자에 툭 던져 놓으신 뒤 핸드폰을 보셨고, 나는 순서표와 시계를 번갈아 보면서 끝날 시간을 예측하려 애썼다.


어머님, 커피 드실래요?

응? 다른 건 뭐 없니?

녹차랑 둥굴레 차도 있어요.

그럼 난 녹차로 부탁해.


 입구 쪽에 비치된 커피와 티백을 발견한 나는 냉큼 달려가 커피와 녹차를 타서 자리로 돌아왔다. 녹차를 건네받은 어머님의 손 반대편엔 순서지가 들려 있었다. 잠시 후 졸업식이 시작했고 어머님은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얘는 뭐 상 받는 건 없겠지?

네, 그런 것 같아요. 이름이 안 보이네요.


 그 뒤 흐르는 침묵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무 무심하게 대답한 것 같아 죄송했다. 어머님은 이미 몇 번씩 수상자 명단을 확인하시면서 자기 딸의 이름이 없단 걸 아셨지만, 그럼에도 기대하게 되는 마음에 무심코 질문을 던지셨던 것 같다. 수상자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아이들은 남자 아이돌이라도 본 듯 환호했고 우린 그 우스꽝스럽고 천진한 모습에 실소를 했다. 졸업을 하는 당사자들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도 시원섭섭할 거라고, 내가 느꼈던 그날의 감정을 떠올리며 짐작해봤다.


모든 수상이 끝나고 이어지는 순서로 졸업생들의 학교 생활을 담은 사진들로 만든 슬라이드 영상을 보여주었다. 학생 때만 해도 3 년이란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는데, 어느새 총알보다 빠른 게 시간이라고 느껴지게 되었다. 여자 친구는 두 명의 동생이 있다. 그중 하나도 얼마 전에 졸업식을 가졌었다. 어머님은 화면에 지나가는 사진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셨다. 나도 함께 사진을 보며, 우리가 사랑하는 한 여자 아이를 찾았다. 


어머님, 자식들 졸업식 다 가셨어요?

물론이지, 쟤 동생들 졸업식은 초등학교 때부터 다 갔어.

자식들 졸업하는 거 보면 기분이 어때요?

어떻긴 뭐,


어색하게 말이 끊긴 어머님께 고개를 돌렸을 때 어머님은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그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아 가슴이 시큰했다. 아버님은 여자 친구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 하늘나라에 가셨다. 그때부터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느라 고군분투했던 어머님은 여자 친구의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셨다. 여자 친구는 중요한 시험을 치을 때도 대학교 면접을 보러 다닐 때도 수많은 학부모들 사이를 지나 홀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시간 참 빠르다. 벌써 졸업이라니. 기특하게..

어머님은 아직 촉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시간이 빠르다는 어머님의 말이 야속하게도 안타깝게도 느껴졌다. 여전히 바쁘게,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야속하기만 하다. 아름다운 추억을 더 만들지 못한 채 얄짤없이 지나가버린 시간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자리에 남는 건 도무지 지울 수 없는 미안함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이 있던 자리엔 어김없이 남아버리는 발자국 같은 감정. 오래 머문 자리일수록 발자국이 선명하다. 지나버린 졸업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봄처럼 포근했던 어제의 날씨가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늘은 올 겨울 가장 추운 날이었다. 오늘도 씩씩하게, 엄마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서둘러 졸업식장을 빠져나오는 여자 친구를 말없이 따라갔다. 그런 여자 친구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씀하시는 어머님을 보며, 여자 친구가 어머님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둘이 서로를 참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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