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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Sep 20. 2016

아빠 노래

 오늘 아침 일이 어제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신없이 바쁘고 긴 하루였다. 무거운 어깨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팔을 끄집어 올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내 예상보다 세 시간은 더딘 시간이 더 달리라고 채찍질하는 기수처럼 아주 고약하고 얄미워 보였다. 거리엔 어느덧 가로등이 켜졌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겨우 막차에 태우고 오늘만 네 번째 한강을 건너 노원역을 향해 달렸다. 유난히 많아 보이는 노원역 계단을 하나하나 짓눌러 밟으며 내려왔다. 밤공기가 등을 탁 치고 지나갔다. 그 차가운 손에 흠칫 놀라 몸을 웅크렸다. 따뜻한 봄 햇살이 사라진 야밤엔 미련하게도 옷을 얇게 입고 나온 내게 손짓하는 냉랭함만 남아 있었다.


 눈 앞에서 버스를 놓쳤다. 다음 버스가 오려면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매 신호마다 네댓 대의 버스가 오는 정거장에 왜 내 행선지로 향하는 버스는 한 대 뿐인 걸까? 수많은 버스 중에 정작 내가 탈 수 있는 버스는 없구나. 그렇게 지나가는 버스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걷기로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차도로 고갯짓 하며 택시를 찾았다. 하지만 택시는 고사하고 4차선 도로를 지나가는 차는 한 두 대에 불과했다. 듬성듬성 서있는 가로등 사이의 어둠을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반대편 인도 위에도. 큰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보니 희미하게 입김이 보이는 듯했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하늘은 하염없이 까맣기만 했다. 그렇게 걷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가로등 불빛에 놀란 동공을 잽싸게 감췄다.


 사 차선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택시 한 대가 내 옆으로 조용히 다가와 나와 함께 신호를 기다렸다. 택시에 타자마자 초록색 불빛이 앞유리에 반사됐다. 택시를 쓰다듬는 가로등 불빛이 히터 구멍에 올린 내 손등을 얼룩덜룩하게 스쳐댔다. 그리고 온기가 돌기 시작한 벌건 두 귀에 유행 지난 노래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도 방송하는 라디오가 있구나, 생각했다. 히터 구멍 위에는 기사 아저씨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었다. ‘개인택시’. 문득 현금이 없다는 걸 깨닫고 카드 계산이 가능한지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미터기에 카드 계산하는 기계가 보였다. 죄송한 마음에 현금을 좀 챙겨 다녀야겠단 의미 없는 다짐을 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거리는 황량했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 붉은빛 신호 아래 홀로 서 있는 택시가 볼록 거울에 처량하게 비쳐 보였다. 몇 년 전 막차를 타고 도착한 구로역에서 총알택시를 경험한 후로 택시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는데, 작은 골목길 신호까지 지키시는 기사님을 보니 마음이 놓이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쏟아지듯 떨군 눈꺼풀은 미터기를 향해 있었다. 저 녀석은 지칠 줄도 모르네. 영롱한 빛을 내며 분주히 움직이는 미터기 위로 은은하게 주황빛이 드리웠다. 미터기 위해 붙어있는 LED 화면은 '아빠 노래'란 글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강산애의 노래가 끝나고 이어서 김광석의 노래가 재생됐다. 그전의 노래들도 빠른 템포의 신나는 곡들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그 적막하고 외로운 새벽을 달리시는 아버지를 위해 노래를 골라 준 자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곡들이 8~90년대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노래였다.  조피디의 ‘친구여’가 나오자 기사 아저씨는 핸들 위로 손가락을 두들기며 박자를 맞추셨다. 아저씨의 얼굴을 보니 고등학생쯤 된 자녀가 있을 듯해 보였다. 그다음 나온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가 이 플레이 리스트에 있는 가장 최신곡 같았다. 제 나름대로 아버지의 취향에 맞춰 선곡했을 노력이 느껴졌다.

 나와 동생도 아버지를 위해 USB에 노래를 넣어드린 적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산울림과 조용필의 음악이 대부분이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요즘 노래도 넣어달라고 하셨다. 난 귀찮아하며 동생에게 미뤘고 동생도 몇 주 뒤에야 윤도현과 자우림의 노래 몇 곡을 더 넣어 드렸다. 마침 윤도현밴드의 '나는 나비'가 재생됐다. 이 노래는 우리 아버지도 좋아하시는 곡이다. 텅 빈 도로를 수놓는 가로등 불빛과 아스팔트마저 붉게 물들인 신호등 속에 울려 퍼지는 노래를 가만히 듣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 와갔다. 마지막 신호를 기다리며 보닛 위로 반사된 붉은빛을 보다가 불현듯 이 트랙 리스트를 만든 건 딸일 것만 같았다. 이렇다 할 이유는 없지만, 택시 안엔 사진 한 장 없었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아저씨의 목소리는 새벽을 알리는 수탉처럼 절도 있고 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입술 한 번 열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차가워진 몸을 웅크렸다. 편의점 조명에 비친 입김은 더 짙어진 것 같았다. 피곤하다.

 터덜터덜 걸을 때마다 참 길었던 오늘 하루가 눈 앞에 한 장씩 넘어가는 듯했다. 택시에서 내릴 때 흘러나오던 김광석의 "일어나"의 후렴구가 내 입술에서 무심코 나와 나지막이 귓가에 머물렀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 하루의 끝에 열심히 살아오신 한 아버지를 만났구나. 모든 열심에는 따뜻한 이유가 있다. 잠시 얼어붙은 손과 귀를 녹여줄 은은한 주황색 불빛의 따스함이 가로등불 아래를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의 열심을 응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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