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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Jan 30. 2020

영화_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


서로의 어떤 점을 사랑했는지 말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서로의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 귀엽고 사랑스러움으로 표현하는 단어들이 슈가파우더처럼 사르르 뿌려졌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서로에게 전해지질 못했다. 그렇게 둘의 비극은 돌이킬 수 없는 갈림길에 들어섰다.


 니콜이 이혼을 결심한 이야기는 작은 돌멩이에서 시작해 꼼짝 않는 바위가 되어 마음을 콱 틀어막았다. 니콜의 사랑은 순전했다. 온전히 찰리의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 그러나 사랑이 희미해지자 그 헌신과 배려는 ‘take’를 요하는 ‘give’가 되었고 강요당한 희생이 되었다. 그 배신감과 상처는 크다. 다시 사랑하는 것 외에는 회복할 방법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은 상처로 깊이 페인 지하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서 그 또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이 상처와 괴로움을 겪으며 사랑을 포기하게 되는 것 같다. 적당히 사랑하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던진다. 그러나 동시에 온전한 사랑과 헌신에서만 받을 수 있는 달콤함을 원한다. 몸에 힘을 다 빼지는 않고 물 위에 떠있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가 없는 사람은 결코 사랑할 수 없다. 나의 첫사랑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 나는 웅크린 내 마음에 다시 용기를 내라고 다그쳤었다. 여느 노랫말처럼 심장을 뜯어낸 것처럼 아팠지만, 그렇다고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온전한 사랑이라는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젠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찰리의 언행이 조금씩 거슬렸는데, 핼러윈 때 아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더 이상 찰리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들을 차에 태울 때나 아들의 코스튬을 강제하는 것도 별로였지만, 아들의 피곤함은 무시하면서 자기가 피곤해지자 아들의 요청을 무시했던 게 가장 컸다. 이혼이 진행되면서 찰리는 아들을 마치 목적이나 수단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가 문제의 원인이었고 열쇠였다. 그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었다. 그러나 찰리는 끝까지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정말 니콜을 사랑하긴 했던 걸까?


 니콜은 이혼 소송 중에도 찰리의 수상 소식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변호사가 그를 칭찬할 때도 입가에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찰리가 점심 메뉴를 고르지 못하자 대신 골라주기도 했고 찰리의 토스트 농담을 혼자 이해하고 웃었다. 니콜은 정말 찰리를 사랑했던 것이다. 진짜 사랑했기에 이혼을 결심한 그녀의 결단 또한 진정하고 확고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법정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엔 변호사들이 설전을 벌인다. 둘의 거리를 이만큼 멀어지게 만든 건 그 사이에 앉은 변호사들이 말하는 내용들일 것이다. 그들의 말은 날카롭고 무례하다. 그게 정말 찰리와 니콜이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찰리의 집에서 두 사람이 쏟아놓는 비수 같은 말들도 정말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왜 이토록 아픈 말들을 해야만 했을까? 그 말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큰 상처를 주는데도. 변호사들을 너머 서로를 바라보는 눈짓과 표정은 그 말들, 그 사실들 너머에 무언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서로를 사랑했던 점을 먼저 말해주었다면! 그 너머에 있던 그것을 말할 용기가 있었다면!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말을 해서 생길 일,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했을 수도 있다. 그 일로부터 누군가(혹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행동하는 게 좋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하지 않은 것이 관계를 망치고 상대를 망가지게 한다. 정말 해야 할 말을 숨기기 위해 불필요한-오히려 독이 되기도 하는- 말로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한 과일 하나가 과일 상자 전체를 상하게 만든다.

 회피는 모든 문제 해결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방법이다. 상황을 정체시키면서 당사자는 헛된 합리화에 빠트리기 때문이다. 회피하고 싶은 충동의 크기는 곧 그 관계가 가진 의미의 크기라고도 할 수 있다. 대수롭지 않은 관계를 회피하는 일엔 힘쓸 필요도 없듯 말이다. 그러니 이 사실을 깨닫고 인정해서 더 신중하고 소중하게, 더 끈질기게 관계를 다루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 아닐까? 역시 이를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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