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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Feb 28. 2020

영화_1917

 이 영화는 내게 매우 기독교적으로 느껴졌다. 몇몇 장면에서는 그것이 감독의 의도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신앙 일지 그저 기독교 문화의 반영 일지는 모르나 나에겐 다분히 복음적인 장면들이었다. 이 영화는 생명을 살릴 명령서를 전달하는 전령들의 이야기다. 그러니 성도의 눈으로 이 영화가 보여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부름을 받다.

 블레이크는 자기 형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작전을 떠나지만, 얼떨결에 그를 따라왔던 스코필드는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으로 블레이크를 좇아갔다. 부비트랩으로 인해 죽을 뻔했던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에게 "왜 나를 데리고 왔냐?"라고 따져 물었다. 블레이크는 이런 작전일 줄 몰랐다고, 아무 뜻 없이 데리고 온 것이라고 답한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돌아가도 괜찮다고 말하지만, 스코필드는 끝까지 그와 동행한다.

 자신을 인도하던 블레이크가 죽었다. 스코필드는 이제 홀로 그 길을 가야만 한다. 영문도 모르고 시작한 이 여정에 그는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블레이크의 죽음.

 성도는 모두 부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전령들이다. 사지를 향해 뛰어드는 자들을 멈추게 할 명령서가 우리에게 쥐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한다. 당혹스러움과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맞닥드린다. 철조망에 찔리기도 하고 시체와 함께 뒹굴기도 하며 폭탄과 총탄을 경험하고 칼에 찔리기까지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왜 나야?"라는 절규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 성도의 목숨을 건 전진 앞에 우리는 이내 입을 다물게 된다. 그리고 내가 쓰러질 때, 그 죽음이 다른 누군가의 명분이 되어줄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나 역시 그에게 물어야 한다. "길을 알고 있는가?"


# 지도에 밝은 자, 길을 가는 자.

 블레이크가 작전에 불려 간 이유는 그가 "지도에 밝은 자"였기 때문이었다. 스코필드는 그저 그와 함께였을 뿐이었다. 영화 내내 블레이크는 자기의 위치가 어디인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랬던 그가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을 상황에 이르자 마지막으로 스코필드에게 "길을 안다고 말해줘."라고 요청한다. 스코필드는 그가 쓰러지기 직전에 알려주었던 루트를 읊음으로 답한다.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생명을 살리는 길이다. 내가 있는 위치를 바로 알아야 하며, 나아갈 방향과 각 지점들에 위치한 지표들을 알아야 한다. 성도의 삶에도 이것들이 중요하다. 물리적, 신앙적 나의 위치를 바로 알아야 방향을 파악할 수 있다. 말의 시체, 철조망에 매달린 시체, 폐허, 마을, 숲 등의 지표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 지표들은 '말'을 통해 전해졌다. 성도가 가진 성경이 그것이다.


# 일으켜 세우다.

 첫 장면에서 블레이크는 자고 있던 스코필드를 일으켜준다. 그리고 돌더미 속에 묻혀버린 스코필드를 끄집어내 일으킨다. 무너지는 땅굴에서 벗어나는 동안 스코필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빛을 밝히며 출구를 찾아 나아가는 블레이크를 꽉 잡고 따라간다. "나를 믿어야 해!" 갱도를 뛰어넘어야 하는 순간에 블레이크가 소리쳤다. 스코필드는 그를 믿음으로 뛰었고 그들은 결국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블레이크가 죽어갈 때, 스코필드는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수없이 노력했으나 함께 넘어졌다. 적군을 돕다가 죽임을 당한 블레이크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블레이크는 앞서간 자로써 나에겐 성경 속 인물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의 삶의 기록들은 나에게 길을 알려준다. 그리고 내가 앞을 보지 못할 때, 위기에 닥쳤을 때 그들은 믿음을 북돋아주고 덮쳐오는 죽음을 벗어나 빛에 이를 길로 안내해 준다. 


# 나무

 나무가 갖는 영화적 장치가 무엇일까? 짐작컨데 '안식'일 것이다. 첫 장면에서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나아갈 힘을 잃은 스코필드는 나무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가로 위로를 얻는다. 마침내 모든 사명을 마친 스코필드는 한 나무 밑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사진을 꺼내 본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과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손글씨.

 나무가 주는 평안과 안식의 이미지는 소설 '니글의 이파리'를 생각나게 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무'라고 비유하셨다. 그리고 그는 나무에 달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성도의 여정은 이와 같이 나무에서 시작하여 나무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 여성과 아이

 스코필드의 여정엔 끊임없는 위협이 있었다. 독일군을 피해 숨어 들어간 지하에는 한 여성과 아기가 있었다. 이 전쟁 속 약자는 늘 여성과 아이들이다. 그러나 그 여성과 아이들이야 말로 전쟁으로 핏투성이가 된 남성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었다.

 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이런 존재들이 필요함을 느꼈다. 내게도 군장을 풀어놓고 내 상처를 맡길 수 있는 여성과 아이가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그들의 보호가 되고 그들은 나를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가족의 아름다운 조화가 아닐까? 연약한 자들이 한 데 모여 서로의 약함을 보듬어주는 것은 서로의 약함에 총구와 칼끝을 겨누는 상황 속에서 더욱 따뜻한 빛이 되어준다.


# 달리다.

 스코필드는 불타버린 마을, 폐허 속을 달린다. 머리에 피를 흘려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등을 떠미는 것은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날아드는 총알을 피해 뛰어든 강은 거친 물살로 그를 폭포 밑으로 떨어트려 버린다. 겨우 통나무 하나를 의지하여 숨을 쉬던 스코필드는 지칠 대로 지쳤다. 그때 그를 위로라도 하듯 체리 꽃잎이 그를 감싸 안는다. 그 눈처럼 하얀 꽃잎이 블레이크를 떠올리게 했다. 다시 힘을 내어 육지로 헤엄을 친 스코필드는 시체들을 헤짚으며 기어가서야 겨우 육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는 절규한다. 육신은 지쳤고 아침은 밝았다. 자기는 어딘지도 모르는 숲의 한 끝에 엎드려 있다. 그때 구슬픈 찬송가가 들려온다. 그는 나무들 사이에 요정들처럼 앉아있는 한 부대를 만난다. 그 노랫말처럼 이젠 평온한 죽음을 바라는 듯한 그의 표정은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가 만난 이들이 바로 그가 찾던 부대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다시 힘을 낸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더욱 힘을 낸다. 그를 둘러싼 이들이 죽음으로 달려가기 전에 메켄지 중령에게 명령을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스코필드가 살리고자 하는 그들이 그의 앞길을 막아선다. 

 "1분 후 진격이다!" 한 지휘관의 외침이 들려온다. 아직 250m를 더 가야 하는 스코필드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의 눈앞에는 좁은 참호에 옹기종기 모여 선 군인들이 길을 막아서 있었다. "30초!" 지휘관의 외침이 다시 들려온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참호 위를 바라본다. 결연한 눈빛에 두려움을 숨길 수 없었으나 그는 참호 위로 올라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등 뒤에서 휘슬이 울리고 군인들이 진격을 시작하자 그도 질주하기 시작했다. 포탄이 날아들고 사방에서 군인들이 죽어나간다. 그는 뛰고 또 뛰었다. 그는 뛰어야만 했다.

 복음을 쥔 나의 여정은 어떠한가? 때가 가까웠다고, 말세라고 곧 종말이 이른다고 수많은 지휘관들이 외쳐댔고 경종을 울렸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 역시 스코필드처럼 뛰어야 할 때가 아닐까? 포탄과 총알이 퍼부어지는 저 참호 위를 달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만큼 절박하고 필사적으로 전해야 할 소식이 내 품 안에 있지 않은가?

 대체 무엇이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를 두려워하던 스코필드를 참호 위로 달리게 만들었을까?


# "Last Man Standing"

 마지막까지 명령을 전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 메켄지 중령 앞에서 간부들이 그를 막아섰고 메켄지 중령은 명령을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명령을 따른 메켄지 중령은 희망은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그의 희망이 오히려 그의 부대를 오늘 끝장낼 뻔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전쟁을 끝낼 유일한 방법은 "Last Man Standing"이라고 말한다. 폐허 같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는 이 전쟁에 살아남을 자는 누구인가?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이곳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체와 폐허와 파괴된 전쟁의 흔적들을 만났다. 땅바닥을 나뒹구는 그 시체들은 누군가의 사랑이었다. 다들 품속에 사랑하는 이들의 사진을 품고 있을, 누군가는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그 사람이었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스코필드가 달리는 장면이 내 영혼을 울렸다. 저기 뛰고 있어야 하는 게 나라는 생각이 크게 밀려왔다. '쉰들러 리스트'의 한 장면을 봤을 때 느꼈던 그 감각이었다. 저 삶의 모습이 내 숙명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운명의 선을 목격하는 순간 같았다. 정교하고 얇은 실이 어느 순간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작년에 나를 변화시킨 말씀 중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성경은 말라기서였다. 말라기란 이름은 전령이란 뜻이다. 이 영화는 말라기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전령으로 부름을 받았다. 나는 이 메시지를 전달해야만 한다. 나는 이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를 달려가야만 한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행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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