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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May 31. 2020

시편 23편 묵상

케네스 E. 베일리의 "선한 목자"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성경은 다양한 문학 장르로 쓰여진 책입니다. 그래서 각각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도 다양하지요. 시편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중에 좋은 팁 하나는 첫구절에 주목해 보는 것입니다. 첫구절은 그 시에서 말하고자하는 바를 함축하는 주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첫구절을 깊이 묵상하며 다음 구절들을 읽어내려가면,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마음을 가깝게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첫구절을 이해하기에 앞서, 시편 22편의 1절과 24편의 1절을 읽어 볼까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저는 이 세 시를 한 묶음으로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주권이란 커다란 흐름을 보게 됩니다. 이 흐름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닮았고 성경의 커다란 흐름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글을 쓸 때 중요하고 강조하는 내용을 정중앙에 배치합니다. 따라서 23편이 이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 배치는 다윗이 직접한 것이 아니라 추후 시편을 엮은 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일점일획까지 주관하신 성령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 배치임을 믿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자신에겐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얼핏보면 그는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도 무시받던 막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백전백승의 용사였고 오랜 세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던 블레셋 족속을 물리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나라는 부강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들의 반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충신을 살해했으며, 버리지도 품지도 못할 가시 같은 신하들을 곁에 두어야 했습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젊은 날을 오로지 살기 위해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기가 막힐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시골에서 들풀처럼 지내던 한 소년에게 찾아와 왕위를 주셨습니다. 그의 인생은 역전되고 파란만장,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사건을 옆에서 목격한 가족들이 다윗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나요? 다윗은 여전히 집안에서 없신여김받는 막내로, 여전히 양을 치러 나갔습니다.

 다윗은 왕궁에 들어가 왕 곁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왕위에 한걸음 가까워진 것 같았습니다. 눈 앞에 왕국과 국정이 운영되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더욱 실감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전에서의 생활도 잠시, 그는 오랜 도망을 떠나야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그의 절친 요나단도 끝내 그의 곁을 지켜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죠. 그 괴롭고 억울한 상황에서 그에겐 위로해줄 사람, 기댈 어깨를 내어줄 사람, 의지가 되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더 고통받고 억울한 사람들이 다윗을 의지하려고 다윗에게 몰려가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사울왕이 죽고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는 7년의 시간이 더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다윗은 동족 간의 갈등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 크고 작은 실수들을 했습니다.

 살펴볼수록 다윗의 삶에서 억울함, 외로움, 멸시와 조롱 그리고 배신을 끊임없이 발견합니다. 그에겐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애원할 기도 제목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시편의 대다수가 그의 눈물로 쓴 기도들입니다. 이 배경을 기억하며,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자신을 양에 비유합니다. 다윗은 목자였기에 양과 목자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윗의 고백에 마음을 가깝게 하기 위해 우리도 양의 속성을 알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양은 겁이 많고 예민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은 쉽게 눕질 않습니다. 


[그 누구도 양을 억지로 눕게 만들 순 없다. 양이 자리에 눕는 건 오직 배가 불렀을 때나 갈증이 해결되었을 때, 그리고 야생동물에 의해 위협을 받지 않거나 곤충의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만 가능하다. 목자가 민첩하게 제지하지 않으면, 유기견의 짖는 소리에 양 떼 전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삽시간에 흩어질 수도 있다. ... 람사는 "풀이 풍성한 곳에서 양은 빨리 만족한다. 곧이어 양들은 알아서 자리에 눕고 소화시킨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양들은 흐르는 물을 마시질 못합니다.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양은 아무리 얕은 물가라 해도 흐르는 물을 두려워한다. 중동의 목자들은 물살이 있는 개울에서 양을 방목할 때 개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땅을 판 다음 관을 연결해 물을 마시운다. ... M.P. 크리코리안은 이렇게 서술한다. "물소리가 들리고 물이 시야에 들어오면, 양들은 허겁지겁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가서 자신들의 갈증을 알린다. 하지만 양들은 흐르는 시냇물 가운데서 돌이 방패막이 되어 물살이 잔잔해진 곳을 찾을 때까지 그저 두리번거릴 뿐이다. 양들은 고요히 흐르는 잔잔한 물을 원한다." 목자는 이 사실을 알기에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양들에게 잔잔한 물가를 제공해준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삶의 작은 물살에도 크게 놀라고 당황하며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합니다. 늘 불안해 하고 맘 편히 쉬지를 못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양과 같습니다. 다윗도 양처럼 끊임없이 부르짖었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시"는 자신을 한마리 양처럼 느꼈던 것입니다(시 6:6).

 한글 성경에 "그가 나를 ~ 누이시며"라고 번역했으나 "그가 나를 안정시키시며"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울고 있는 양(다윗)에게 찾아와 안정시키셨습니다. 왜 우는지를 살피시고 그 눈물을 닦아주시며 평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향을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까지 낮아지셔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수고와 희생을 감당하십니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이 자기 인생에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삶의 분명한 방향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다윗의 인생을 인도하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뜻, 비전, 마음이 소원을 따라 행하는 길은 우리 눈에는 좋아보이나 망하는 길입니다(잠 14:12). 인간의 의지는 너무 쉽게 흔들리고 변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뜻)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방해하지 못할 그분의 뜻은 단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고 표현했습니다.


[목자는 진실한 마음과 헌신적인 사랑으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낸다. 이것이 “자기 이름을 위한” 일이다. 따라서 크든 작든 양으로서의 내 가치는, 나를 (찾거나) 회복시키는 그의 결정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다윗은 가족들의 무시, 아내의 조롱, 부하와 친구들의 배신, 도망다녔던 청년의 시기, 아들들의 반역, 돌이킬 수 없는 범죄, 자기 죄악으로 인해 발생한 자녀와 백성들의 피해 등. 그가 겪었던 모든 고난들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해석할 수 있었기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고난이 주는 절망과 아픔과 슬픔이 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무 괴로워서, 아무런 해답도 출구도 찾을 수 없어서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팔과 다리에 힘이 다 풀려버렸을 때도 있었습니다(시 22:14-15). 그러나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다시 살리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구나!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구나! 내 인생이 걸어가는 이 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가는 의의 길이구나!"


 '의의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살 길이고(히 10:20) 하나님의 의이십니다(롬 1:17). 잘 아시다시피 다윗은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향했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도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덕분에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3절의 고백은 모든 어려움을 풀어내는 열쇠가 됩니다! 어떤 상황을 만난다 할지라도 이것 하나만 기억하면 됩니다. "이 길은 의의 길이다, 이 길은 예수께로 가는 예수의 길이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팔레스타인에는 실제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계곡이 있고 모든 목자들이 이것을 알고 있다. 매우 비좁은 이 협곡은 산맥을 통해 연결돼 있는데, 계곡 길이는 약 8km 정도지만, 바닥의 가장 넓은 부분은 고작 3.7m 정도다. 딱딱한 바위 위의 길은 너무 비좁아서, 위험을 만난 양이 방향을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계곡 곳곳에는 2.1~2.4m 되는 작은 협곡들이 침식되어 있다. 림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죽음의 그림자 골짜기란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깊은 협곡들이 있는 산 사이로 바람이 부는 길들을 말한다. 행인들은 강도에게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 길을 빠져나와야 한다. 죽음의 공포가 끊임없이 그들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곤경과 죽음에 촉각을 세우고 떨면서 그 길을 지난다."]


 어렸을 때 높은 곳을 지나가야 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밑을 보며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부모님은 이구동성 아래를 보지 말고 아빠(엄마)만 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야 두려움을 이기고 발을 내딛을 수 있으며, 이 무섭고 위험한 곳을 지나갈 수 있기 때문이죠. 4절 말씀이 딱 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눈을 감고 그려볼까요? 끊임없이 바람이 불어옵니다. 분명 한낮인데도 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합니다. 차가운 바위가 사방에 둘러서 있고 길은 좁아 어깨와 손으로 그 차가움을 움켜잡아야만 합니다. 파스스, 떨어지는 돌맹이를 좇아 내려다 본 바닥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지만, 몸을 돌릴 수도 없을 만큼 길은 협소합니다. 갑자기 눈앞이 하애지고 다리에 힘이 풀립니다. 그러나 주저앉아 버리면 그대로 낭떨어지로 떨어질게 뻔해서 악착같이 버틸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는 오로지 인도자를 바라보는 것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일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한걸음 한걸음 인도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다보면 다시 걸을 힘이 생깁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각기 다른 용도로 사용됩니다. 막대기(rob)는 야생동물이나 적들로부터 양 떼를 보호할 때 사용하는 공격 무기 입니다. 베일리는 "이 도구는 0.6~0.8m 정도로 길고, 끝에는 철퇴와 비슷한 금속붙이가 끼워진 전곤(mace)과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양들은 목자의 이 막대기를 주목하고 있으며, 목자의 막대기가 마치 "경보 시스템"과 같이 모든 무리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지팡이는 일반적으로 막대기보다 길고 가볍습니다. 지팡이는 목자가 기대어 서거나 양들에게 방향을 지시할 때 흔히 사용합니다. 


["지팡이"의 어근인 sh'n이라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는 "무겁게 내리누르다."와 더불어 "기대다", "지원하다" 등이다. 아랍어 성경은 이런 명확한 의미를 가지는 'uqqaz'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서 있거나 걸을 때 혹은 기어오를 때, 목자는 자신의 지팡이에 의존한다. 지팡이 끝은 갈고리처럼 굽어 있다. 양이 절벽이나 낭떠러지에서 강기슭이나 바위 틈새로 기어 나오지 못할 때, 목자는 지팡이의 굽은 부분으로 양의 다리나 어깨를 낚아챈 후, 부드럽게 끌어올려 원위치시킬 수 있다. 목자의 지팡이의 용도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게 아니며, 매일 양들에게 필요한 양식과 물과 평온과 휴식처를 찾아 양들을 이끌고 돌보는 것이다.]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바라보고 기억했던 것은 강하신 하나님의 보호(막대기)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평안과 행복과 만족(지팡이)였습니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식사 접대는 중동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동료나 가족으로 여긴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상을 차리는 일에 대해 알면 좋은 상식이 더 있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쓴 고대 중동에서 상을 차리는 일은 여자나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손님을 환대할 때에도 아내와 종들에게 요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님들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창 18:8).

 이것이 주께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신다 고백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 종이 되셨습니다. 강력한 주권과 리더쉽으로 인도하시는 듬직한 남성과 우리의 연약함을 살피고 세심하게 보듬으시는 여성이 하나님의 성품 안에 담겨 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라는 표현은 탕자 비유로 알려져 있는 누가복음 15장 11-32절이 이해를 도와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중동 지역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공동체의 명예를 개인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죽어야 받는- 유산을 받아챙긴 아들이 어떤 평가를 받았을지 뻔합니다. 아버지가 마을 밖에 아들을 발견하고 달려와 끌어 안았던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먼저 그 아들을 발견한다면 반드시 돌을 던져 죽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품속으로 끌어 안아 지켰고,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 아들을 보면 죽이기로 마음먹었던 마을 사람들이요 곧 아들의 원수들이었습니다. 이 이미지가 본문에서 말하는 "원수의 목전에서"의 이미지입니다.

 이 이미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권선징악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서 이 본문을 원수들 앞에 의기양양하게 앉아 식사하는 모습, 그 모습을 보며 굴욕감을 느끼는 원수들의 이미지로 해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초점은 한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 선한 목자, 주 여호와 하나님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은 여기서 '환대'를 의미합니다. 주님을 떠났던 우리를 환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머리로부터 흘러내려 온몸을 적시고 향기가 진동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는 넘치고 넘칩니다! 잔이 빌 때마다 잽싸게 그 빈잔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시중은 신실합니다! 크고 강하신 분, 만왕의 왕이시요 존귀하고 유일하신 분께서 내곁에 서서 내 시중을 들어주십니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 고작 수십억명 중 하나인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그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무엇이 부족하다 말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을까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기자의 가장 절실한 필요가 하나님의 선하심(tov)과 인자하심(khesed)로 채워져야 한다고 단언한다. 본문의 시작과 끝에는 오직 “여호와(the Lord)”라는 표현만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 양 떼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늑대나 사자가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tov)과 “인자하심”(khesed)이 그의 평생에 걸쳐 뒤따른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tov)과 인자하심(khesed)는 성경 전반에 걸쳐 강조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이 두 단어로 성경 전체를 해석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대표적인 내용들만 찾아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선하심'으로 번역한 '토브'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하셨던, "좋았더라"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아름다움, 복, 형통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인자하심'로 번역한 '헤세드'는 은혜, 후대하다, 사랑, 자비 등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신명기 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심을 '헤세드'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4장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8절)",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10절)."는 귀한 말씀에서도 헤세드(자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목록에서 두 번째 단어는 khesed(자비, 은혜, 자애심)이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이 단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한쪽 측면은 언약(covenant) 안에서의 신실함을 뜻한다. 다른 측면은 무가치한 대상에게 값없이 제공되는 은혜를 의미한다.]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유기체에게 가장 약한 곳은 등 뒤일 것입니다. 뒤로부터 닥쳐오는 기습은 아무리 강한 자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등 뒤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지켜주고 있다는 것은 더할나위없는 안전과 평안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불안하고 두려울 때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뒤를 지켜주고 있는 그 토브가 무엇인지, 그 헤세드가 무엇인지를 알고 깨닫는 만큼 우리는 힘을 얻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임재'로 이 아름다운 시를 감싸고 있습니다. 2절에서 5절까지의 내용은 그 임재로 누리게 될 당연한 것들을 풀어 설명했을 뿐입니다. 그의 표현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뜨겁고도 포근한 사랑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이 꿀송이 같은 다윗의 고백을 감싸는 '여호와'의 의미를 묵상함은 우리를 더 깊은 은혜와 사랑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 케네스 E. 베일리의 "선한 목자"(새물결플러스)를 참고. [ ]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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