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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Jun 14. 2020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8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풍랑 속에서 바람을 보는가, 예수를 보는가에 따라 나의 상황은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베드로가 풍랑을 멈추어달라고 구하지 않고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했던 질문이 옳습니다. 그 질문은 오직 예수 중심인 사람만 할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풍랑을 멈추어 달라하고 그 응답을 받는다면, 그 배에 예수님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 위를, 그것도 풍랑에 요동치는 물 위를 걷는 것은 그 인생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커다란 '그리스도의 흔적'을 세기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바다에 파도는 그치지 않습니다. 똑같은 파도가 없듯 그야말로 "여러 가지 시험"이 닥쳐옵니다. 그러나 변함없으신 주님,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행복의 근원이신 분께서 내게 "오라" 말씀하십니다. 이 풍랑을 뚫고 "자, 여기 내가(기쁨이) 있다."며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걸음마다 주님의 능력과 지존하심이 역사합니다. 여전히 포효하는 파도들을 밟고 서서 나를 부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구주 되신 신랑께서 다시 오실 것이란 믿음만으로 하염없이 기다리는 태도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와 사랑의 속성에 인내와 오래 참음, 견딤 등의 표현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듭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온전히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새번역)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자주 이야기하고 누차 강조합니다. 그 믿음은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믿음의 시련은 나무에 난 생채기처럼 인내라는 진액이 맺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시련이 있어야 믿음이 믿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믿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며, 그리스도는 필연적으로 십자가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뿌리 삼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요 17:3). 사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엡 2:8). 우리에게 이 믿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 우리가 이미 받은 믿음을 붙잡고 지킬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6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   그런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요?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사람은 주님께 얻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렵고 끔찍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의심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는 것, 불안정함, 바람에 밀려 출렁임이 의심이라고 말합니다. 뒤집어보면, 순전한 마음, 안정, 굳건함이 곧 믿음이라는 말이 됩니다. 순전한 마음은 '거룩'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안정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강(샬롬)을 의미합니다. 굳건함은 반석의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종합해보면, 야고보가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라고 말한 의중은 "조금도 예수를 떠나지 말라"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자주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불안, 염려, 걱정과 고민 등은 물론이거니와 삶의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선택 장애도 불신앙으로 본다면 확대 해석일까요? 간단한 메뉴 선택에서도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창 3:6)"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창 1:31)"을 기준 삼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발견할 것입니다. 참으로, 종교적일 때만 말씀으로 생각하고 일상에서는 나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인 것입니다.(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믿고 구해야 합니다."라고 강권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하고 교제하지만, 그것으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막 9:5)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찾고 갈구하고 붙잡아야만 합니다(시 42:1, 마 20:31).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믿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목이 터져라고 소리 지르는 바디매오, 자존심과 체면까지 내려놓고 구걸을 하고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 돌에 맞아 죽을 각오로 예수의 옷자락을 잡은 여인의 모습이 믿음입니다. 영혼이 심히 가난하고 애통하고 주리고 목말라서 사력을 다해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마 5:3-6). 이 믿음이 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풍랑이 그치길 구하지 않습니다. 풀무불이 꺼지길 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환난 속에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시련을 당하는 와중에 기뻐하며, 활짝 웃음 짓습니다. "나의 사랑, 멋있어라. 나를 이렇게 황홀하게 하시는 그대!(아 1:16)"라고 외치며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히 13:12-13). 이런 사람은 바람이 밀어 넘어뜨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짓밟고 나아갑니다.

 여전한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에 그 크신 사랑을 힘입어 인내하며 그분께 나아갈 믿음을 얻습니다. 이때 인내는 데이트 장소로 향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가 됩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예비부부의 인내가 됩니다.

 사랑!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나길 기다리는 설렘과 온천하가 예식장이 될 결혼식을 준비하는 열심으로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그래서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뜨겁게 사랑(벧전 1:22)"할 수 있는 것이며,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할(골 3:14)"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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