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루 Jun 23. 2020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역대하 30:1-27

25   유다 온 회중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모든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들과 유다에 사는 나그네들이 다 즐거워하였으므로

26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역대기는 포로기 때 쓰여졌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빼앗기고 망했을 때, 더 이상 소망이 없을 때, 아무런 기대도 없이 오로지 좌절과 절망이 가득할 때, 이 본문을 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늙은이들은 그 기쁨을 어렴풋 기억했을까? 젊은이들은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을까? 그러나 분명히 모두가 영혼 깊숙한 곳에서 그 기쁨을 원하는 처절한 비명을 느꼈을 것이다. '예루살렘' 그 글자만으로도 뼈가 으스러지도록 가슴을 치는 자가 있었을 것이고, '이스라엘'이란 이름만으로도 눈이 멀도록 우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1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2   왕이 방백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과 더불어 의논하고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으니

3   이는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 부족하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하였으므로 그 정한 때에 지킬 수 없었음이라


 히스기야 왕은 성전을 재건하고 예배를 회복하고자 힘썼다.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3절만 봐도 알 수 있다.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 부족하고" 예배도 없었고 거룩도 없었다. 제사장들마저 불경한 삶을 거리낌 없이 살았다. 그랬던 백성들이 이제 유월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대표적인 절기다. 그러나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억하는 소중한 절기로써의 의미가 더 컸을 것이다. "왕과 온 회중이 이 일을 좋게 여"겼다(4절). 지금까지의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윗 때와 솔로몬 때의 영광을 회복하길 바라는 기대와 소망을 품었을 것이다.


5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려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온 이스라엘에 공포하여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

6   보발꾼들이 왕과 방백들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왕의 명령을 따라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두루 다니며 전하니 일렀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 남은 자 곧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에게로 돌아오시리라

7   너희 조상들과 너희 형제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멸망하도록 버려 두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니라

8   그런즉 너희 조상들 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돌아와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 그의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

9   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가 사로잡은 자들에게서 자비를 입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


 "드디어" 유월절의 준비를 마쳤다. 이제 온 백성을 불러 모아 하나님 앞에 예배를 올려드리는 일만 남았다. 왕은 벅차고 급한 마음으로 보발꾼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들이 이스라엘 구석구석에 전하는 소식은 선지자들이 전한 복음과 다를 바 없었다. 어느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메시지는 동일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이 메시지는 이스라엘과 유대에 거하는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졌으나,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는 자들에게도 전해졌다. 이미 교회의 교인이요 성도로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전해지는 복음이다. 참으로 여호와께 돌아가는 일은 인간의 일생이 걸어가는 길이다. 그렇기에 성도의 구원은 단회적이며 진행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단회적 구원이 주는 복에만 만족하며 안주하려고 한다면, 이는 "목을 곧게 하"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결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얼굴도 못 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얼굴도 못 본 사람의 말을 따르는 일엔 늘 배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얼굴도 못 본 사람을 향한 충성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10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이 말씀을 접한 포로 된 백성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만약 나였다면, 뭐하는 짓이냐며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당신들의 그 조롱 때문에 우리가 조롱을 당한다, 당신들의 그 비웃음 때문에 우리 민족은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정신 차려라 이 사람들아! 재앙이 코앞이다!"라고 외쳤을 것이다. 본문의 두 장만 앞으로 가도 재앙이 예언되었고 두장을 뒤로 가면 멸망을 만나게 된다. 앞뒤로 재앙이 욱여싸고 있는 이 본문에서 10절은 틈처럼 그 재앙의 물줄기가 새어 들어오게 만든다.


18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들을 깨끗하게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를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이르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19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하게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

20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왕의 기도로 성결하지 못한 자들의 예배가 받아졌고 오히려 그들이 고침을 받았다. 유월절을 지키고자 노력한 저들의 마음과 하나님 앞에 어떻게든 정결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15-17절)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의 예배를 받길 원하신다. 마음이 상한 자의 행동은 극단적이다.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그래서 어린아이 같다. 막무가내지만 그 마음은 오로지 '아버지'만을 향한다. 머리가 크면 이 방법, 저 방법을 생각하지만, 어린아이는 온 우주에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자기 아버지밖에 없다고 여긴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예배를 받길 원하신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성결하게"했다(15절). 겸손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고 성결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으로써 성도는 성결하지 못한 자들이 성결해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17절). 

 히스기야 왕의 기도는 포로 된 백성들에게 소망이 되었다. 정결하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으나 고침을 받았다. 이는 차고 넘친 죄악으로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받을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


 그들은 20절의 이 말씀을 외우고 또 외웠을 것이다. 떨어지는 눈물만큼 외쳤을 것이다. 그 암흑 같은 시기에 여호와께서 들으신다는 말씀은 이미 충분한 복음이 되었다. 들으신다! 들으신 분이 고치신다. 오로지 이 한 구절을 붙잡고 산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들으신다. 여호와,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이름,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이름, 애굽의 포로였던 조상들을 구원하여 길갈로 돌아오게 하신 그 이름, 여호와. 여호와께서 들으신다.


21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칠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하며 큰 소리 나는 악기를 울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

22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능숙한 모든 레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

23   온 회중이 다시 칠 일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이에 또 칠 일을 즐겁게 지켰더라

24   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만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으며 자신들을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도 많았더라


 그들은 "크게 즐거워했"다.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다. 그 예배는 끝나지 않았다. 완전수 칠 일을 다 채우고도 또 완전하게 하였다(23절). 칠일은 안식일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안식하고 또 안식했다.


"자신들을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도 많았더라."


  스스로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 "부족(3절)"했으나 이제는 "많아"졌다. 내 삶에 예배가 끊이지 않을 때, 매일을 안식일로 거룩히 지킬 때, 내 삶은 성결해진다. 부정한 것들이 하나둘 씻겨 나간다. 이 대목에서 포로 된 백성들의 영혼이 불타오르지 않았을까? 더욱 성전의 회복을 사모하고 예배의 회복을 사모하게 됐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안식을 회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역대기와 열왕기는 포로 된 백성들이 스스로를 반추하게 했다. 어쩌다 이지경이 된 것인지, 원래 우리는 무엇을 바라 왔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놓쳐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육체의 즐거움을 좇아갔으나 그 결과로 "큰 즐거움"과 "큰 기쁨"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으나 유린당하고 버려진 창녀가 되어버렸다. 그런 자들이 이 본문을 읽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눈앞에 하얘지고 아찔하지 않았을까?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나처럼 울었을 것이다. 스스로 왜 우는지 이성과 지성으로 알지 못한다 해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포로다. 재앙은 이미 이르렀다.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작가의 이전글 20062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