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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Jul 12. 2020

무엇을 보는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에,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어디든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거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 하란으로 가서,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 하나님께서 그를 하란에서 지금 여러분이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습니다. (행 7:2-4)"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갈대아를 떠났다. 고대 사회에서 이런 행동은 가문의 목숨을 건 결정이었다. 말씀에 순종한 그들의 결단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가나안 땅이 아닌 하란에 머물렀다(창 11:31). 그렇게 위대한 순종은 하란에서 중단되었다.

 가문의 가장이었던 데라가 이 순종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의 뜻처럼 '지체하고' 하란에 '거주했다.' 위대한 순종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받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도 있다. 그러나 위대함이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은 반드시 상실과 포기와 핍박의 위협을 만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귀는 선악과를 제시한다. 그것은 참으로 보암직하고 먹음직해 '보인다.' 지칠 때 편히 쉴 침대 같아 '보이기도' 하는 그것들은, 상황이 너무 절묘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창 13:10). 데라의 눈에 하란이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떠나기를 '주저했고' 그곳에 '거주해' 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람에게 임했으나 그는 데라에게 속해 있었다. 아브람의 삶을 주장하는 것은 '지체함'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데라를 데려가신 뒤에야 아브람은 가나안 땅으로 다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주목할 것은 데라의 죽음이 아브람의 순종으로 직결된 것이 아니란 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말씀하셨기에 아브람은 다시 순종의 길로 나아갔다. 등 떠밀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창 12:1-4).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 15:6)"


 그 후로 아브람은 참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워갔다. 천하의 바로도 꼼짝 못 하게 하시는 분, 왕들의 군대를 격파하시는 분, 그렇게 아무 거리낌도 받지 않으시며 자기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임을 배워갔다. 마침내 15장에 이르러 아브람과 그의 자손들에게 매우 중요한 언약이 채결된다. 이때에 아브람의 믿음이 성숙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 이상 하란에서 지체하던 아브람도,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람도 아니었다. 미성년자는 계약을 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으나 이제 아브람은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할 만큼이 된 것이다. 아브람의 믿음이나 신앙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표현도 틀리지는 않겠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만큼 쌓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 사람 여종이 있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의 여종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온 지 십 년이 지난 뒤이다.(창 16:1-3)"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사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이 아브람의 실수였고, 하나님을 멸시한 죄악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했다. 그 결과,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려 했다. 임신을 했고, 아브람의 아들이 태어났다. 그의 나이는 이미 85세였다. 아들을 낳은 것을 기적으로 여길만 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 아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다.'

 아브람의 믿음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는 처음 약속을 받고(창 12:1-4) 무려 10년을 기다렸다. 이미 고령의 나이에 자손을 약속받았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했을 것이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확률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해를 넘길 때마다 조급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브람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10년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묘책'이 떠오른 것이다. 하갈과 동침하고 아들을 품에 안으며 아브람은 그 묘책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라고 지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오랜 소원을 들으시고 응답하셨음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찬양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13년의 '침묵'이었다.

 하나님에게 10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대의 신으로 여겨졌던-바로를 심판하시고, 강력한 왕들이 뭉쳐 덤벼도 능히 이길 수 없었던 하나님을 아브람은 기억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브람의 눈은 늙은 자신과 사래를, 젊은 하갈을 향했다. 그 결과는 행악이었다.


 무엇을 보는가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고 약속의 증거들을 바라본다고 고백한다. 선악과를 보면 그것을 먹게 되고, 하란을 보면 거기 머물게 되고,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 약속의 땅을 떠나게 되고, 하갈을 보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멸시하게 된다. 우리의 눈은 얼마나 간사한지, 은 30을 보고 있노라면, 민족의 구원도 가소로워 보이게 된다(마 26:15). 무엇을 보는가? 지금 내 눈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가?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행 17:1)"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첫마디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였다. 아브람의 상식, 판단, 경험을 따라 아브람이 행할 수 있는 능력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멸시'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우리의 유한함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런 '행악'을 '순종'이라고 착각하는가?


결국 우리는 유한한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자신은 점차 축소되어 실재보다 격하된 하나님이 되신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다.”(D.A. 카슨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나의 상황과 상식에 '낮추어' 적용한다. 그것은 말씀 적용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죄'다. 자기 멋대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셔."라는 전제를 진리인 양 세워놓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시며 단 하나의 전제만을 세우신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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